하입보이

by도시은둔자

1화. 하입보이

그 노래를 들으면 나는 아직도 스물다섯 살이 된다. 퇴근길 지하철에 서 있던 스물아홉 살의 내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몇 초의 음악 때문에 갑자기 네 해 전 여름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여전히 내 옆에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열차는 늘 그렇듯 다음 역을 향해 달리는데, 나만 잠깐 다른 시간에 놓인다. 그때의 나는 사랑이 시작되고 있다고 믿었다. 지금의 나는 그게 정말 사랑이었는지 가끔 궁금해한다.


2026년 10월의 어느 저녁이었다.

퇴근 시간의 지하철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나는 문 옆에 서서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회사 단체 대화방에는 내일 오전 회의 자료를 확인해 달라는 메시지가 올라와 있었고, 친구에게는 저녁을 먹었느냐는 연락이 와 있었다. 둘 다 지금 당장 답하지 않아도 되는 메시지였다. 나는 화면을 껐다가 다시 켰다.


그때 노래가 흘러나왔다.

하입보이.

누군가의 휴대전화에서 새어 나온 소리인지, 내 이어폰에서 재생되고 있는 노래인지 처음에는 분간하지 못했다. 나는 무심코 화면을 내려다봤다. 재생 목록에 오래전에 저장해 둔 노래가 있었다. 언제 넣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몇 년 전이었을 것이다. 지우지 않았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알았다.

나는 재생을 멈추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수많은 노래를 들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어떤 노래는 오래된 사람 하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얼굴을 잊었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강민석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다. 웃을 때 한쪽 눈이 조금 먼저 접히는 것,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대답하기 전에 잠깐 고개를 숙이는 것, 상대가 말하는 동안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는 버릇 같은 것들.


다만 그를 생각하지 않고 지내는 날이 많아졌을 뿐이었다.

그날도 그럴 예정이었다. 회사에서 돌아와 냉장고에 남은 음식을 데워 먹고, 밀린 빨래를 돌리고, 잠들기 전에 읽다 만 바카라을 몇 페이지 읽을 생각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스물아홉 살의 나는 대체로 그런 날들을 좋아했다. 누구의 답장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를 오래 붙잡고 그 안에 다른 뜻이 있는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

스물다섯 살의 나는 그런 날들을 조금 심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민석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어떤 연애를 하게 될지 나름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티가 날 것이고, 상대도 나를 좋아한다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연락이 오면 기뻐하고, 만나면 즐겁고, 헤어질 때 아쉬우면 다음 약속을 잡으면 되는 일이었다. 서로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 어려울 이유가 없었다.


물론 영화나 소설 속 연애가 현실과 다르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사랑을 아주 쉽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었고, 마음을 열기까지도 오래 걸렸다. 그래서 한번 마음이 움직이면 그 감정을 함부로 취급하고 싶지 않았다.

민석을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사람은 마음을 여는 데 오래 걸리면서도, 열린 마음을 지키는 데는 그보다 훨씬 서툴 수 있다는 것을.


지하철이 역에 멈췄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리고 또 올라탔다. 내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갔고, 나는 습관처럼 괜찮다고 말했다. 문이 닫히자 열차가 다시 움직였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어두운 터널 속을 미끄러져 갔다.


나는 노래를 끝까지 들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여덟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현관에 신발을 벗어 놓고 불을 켰다. 싱크대에는 아침에 마시고 둔 커피잔이 있었고, 소파에는 주말에 입었던 옷이 걸쳐져 있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바깥 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지민이었다.

「잘 지내?」

나는 짧게 답했다.

「응. 너는?」

곧바로 답장이 왔다.

「나야 늘 그렇지. 갑자기 궁금한 게 있어서.」


지민은 원래 용건을 먼저 말하는 사람이었다. 안부를 묻고 나서야 본론을 꺼내는 일은 드물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답장을 기다렸다. 화면 위에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너 혹시 민석이 소식 들었어?」

나는 한동안 그 이름을 바라봤다.


강민석.


입으로 소리 내어 부르지 않아도 그 이름은 이상할 만큼 익숙했다. 오래전에 사용하지 않은 비밀번호를 우연히 떠올린 것처럼, 기억은 별다른 노력 없이 그 이름 뒤에 붙어 있던 장면들을 꺼내 놓았다. 늦은 밤의 카페, 비가 오던 골목, 내 말을 듣다가 웃던 얼굴. 그리고 내가 그에게 묻지 못했던 질문들.

나는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아니. 왜?」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내가 조금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석에 관한 소식을 듣는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나와 헤어진 사람도 아니었다. 적어도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같은 대답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헤어졌다는 말조차 정확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귀었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 두 문장 사이에서 아주 오랫동안 망설였다. 누군가 우리 관계를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친한 사이였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기억했고, 연인이었다고 하기에는 아무것도 약속받지 못했다. 친구라는 말은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웠고, 사랑이라는 말은 그가 동의하지 않을까 봐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웠다.


그때의 나는 이름을 붙이지 못한 관계도 언젠가는 제자리를 찾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기다리면 민석이 말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보다, 우리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를 묻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묻지 않았다.

나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 대답 때문에 지금까지의 모든 순간이 달라질까 봐 두려웠다.

지민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냥.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났거든.」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답장이 늦었다. 지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민석이 결혼했다는 소식일 수도 있고, 다른 도시로 이사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그가 잘 지낸다는 말 한마디라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나는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오랫동안 궁금해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그의 이름이 눈앞에 나타나자, 내가 정말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인지 자신이 없어졌다.


잠시 뒤 지민이 메시지를 보냈다.


「너한테도 한번 물어보고 싶었어. 너는 그때 민석이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나는 화면을 바라봤다.

그 질문에는 쉽게 답할 수 없었다. 민석을 좋아했다고 말하면 간단했다. 실제로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그때 내가 좋아했던 것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민석이라는 사람 자체였을까. 그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었을까. 그와 함께 있을 때 내가 조금 더 재미있고, 조금 더 특별하고, 조금 더 사랑받을 만한 사람처럼 느껴졌던 순간들이었을까.


나는 아직도 그중 무엇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를 만난 뒤로 나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좋아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친절을 곧바로 믿지 않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친절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안에 내가 원하는 의미를 덧붙이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약속이 미뤄지면 이유를 먼저 찾기보다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차리려 했다. 답장이 늦는다고 해서 상대의 마음을 함부로 추측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변화가 모두 민석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고, 어떤 일은 지나간 뒤에야 배울 수 있다. 그래도 민석을 만나기 전의 나와 그 이후의 내가 같지 않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지민에게 답장을 보냈다.


「좋아했지. 많이.」

보내고 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 말은 여전히 사실이었다. 민석이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와 상관없이, 그때의 나는 그를 좋아했다. 그 사실을 부정한다고 해서 상처가 작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가 내 마음을 같은 크기로 받아 주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느낀 감정이 가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지민은 한동안 답하지 않았다.


나는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맞은편 아파트의 창문마다 서로 다른 저녁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는 식사를 하고, 누군가는 아이를 재우고, 누군가는 퇴근하지 못한 채 바카라상 앞에 앉아 있을 것이다. 나와 상관없는 수많은 생활이 각자의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문득 민석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별다른 일은 없을 예정이었다.


지민이 친구 몇 명과 저녁을 먹자고 했고, 나는 약속 장소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 식당 안은 시끄러웠고, 자리는 이미 거의 차 있었다. 누군가 내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빈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사과부터 했다.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나를 보며 웃었다.


“처음 뵙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강민석이에요.”


그는 그렇게 자기 이름을 말했다. 특별할 것 없는 인사였다. 그때의 나는 그 이름을 오래 기억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이 내 인생의 어느 한 시절을 통째로 바꿔 놓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처음 보는 남자가 웃었고, 나는 그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나는 그 시작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고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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