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여덟 아버지와 병원 가는 날-
나에게는 아흔여덟 되신 아버지가 계신다.
병원 진료에 동행하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와 조금 더 가까워졌고, 아버지를 더 알게 되었다. 진료를 마치면 함께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나눈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들어드릴 때가 많다.
사실 아버지와 나는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결혼하고 내 생활이 바쁘다 보니 늘 얼마간의 거리가 있었다.
내가 동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큰 병이 아니면 혼자 병원에 다니셨다. 그러다 아버지가 어느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보신 뒤 몹시 화가 나서 전화를 하신 적이 있다.
간호사의 말을 잘 못 알아들으셨는지, 자신을 괄시하는 것 같다며 노여움이 크셨다. 노인 혼자 진료를 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종합병원은 복잡하고 동선도 길어 더욱 그렇다.
전화를 끊고 병원에 연락해 전후 사정을 들어 보니 간호사 쪽에도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혼자 진료 보러 가신 연로한 아버지에게 안내가 좀 부족한 것 같아 아쉽다는 이야기를 전하자 간호사가 아버지께 직접 사과 전화를 드리고 싶다고 했고,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뒤로 병원을 바꾸셔서 좀 더 거리가 있는 다른 병원에 다니신다. 사과를 받았어도 마음이 풀리지는 않으셨나 보다.
그 일이 내 마음에 오래도록 걸렸다. 귀도 어두워지시고 연세도 있으시니, 3년 전 퇴직한 뒤로는 아버지의 병원 진료만큼은 내가 동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얼마 전 병원에서 진료를 기다리는데, 옆자리 어르신이 아버지를 보시더니 뭔가 말을 걸고 싶어 하셨다.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내가 물었다.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그분이 아버지를 향해 물으셨다.
아버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아흔여덟이요."
어르신은 눈이 커지더니, 주변에서 90대 초반 어르신은 뵈었어도 이렇게 연세 많으신 어른은 처음 뵌다며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대단하세요, 어르신. 축하드립니다!"
"뭐, 약으로 살지요. 고마워요."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대답하셨다. 그 웃음이 어떤 마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진료를 마치자 아버지가 밥을 사시겠다고 하셨다.
"왜요?"
"니가 이것저것 심부름한다고 애쓰니 내가 한번 사는 거다."
나는 좋다며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두어 해 전부터 소화가 잘 안 된다며 아침, 저녁 두 끼만 드시고 점심은 두유 정도로 간단히 넘기신다. 그런데 그날은 나를 위해 점심을 하자고 하신 것이다.
나는 요즘 아버지의 집사다. 은행 심부름도 하고 필요한 물건도 챙긴다. 내가 동행하기 전에는 아버지가 대부분 필요한 물건을 직접 사거나 전화로 주문하셨다. 자식이 있어도 해 달라고 하시기보다는 웬만한 일은 스스로 해결하셨다.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식에게 선을 그으시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관리하는 아버지 통장의 돈을 필요할 때 꺼내 쓰라는 말씀까지 하셨다. 처음 하신 말씀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였을까, 나는 무어라 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말씀드렸다.
"아이고, 그리 말씀해 주시니 듣는 딸 마음이 너무 좋네요."
식사 후에는 자리를 옮겨 카페에 갔다. 아까 병원에서 옆자리 어르신이 축하한다던 장면 이야기를 하다가 여쭈었다.
"우리 아버지, 기분이 어떠셔요?"
"뭐, 그런 소리 많이 듣는데…… 아휴, 고맙다고는 하지만 내가 속으로는 '니들도 한번 살아봐' 이러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글쎄, 살아보면 안다고…… 다들 떠나고, 나를 부럽다고 70대, 80대들이 그러지만…… 하루하루가 그러지."
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도 나는 그 속마음을 다 알기 어렵다.
아버지를 댁에 모셔다 드리고 집으로 향할 때면, 조용히 그 마음을 가늠해 본다.
니들도 한번 살아봐.
오늘 아버지의 모습에서 나의 내일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