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은 없었다. 가질 일도 없었다. 그 나이에는.
주머니 속에서 동전 부딪히는 소리만 나면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았다.
백 원짜리 두 개, 운이 좋은 날이면 세 개. 손가락 끝으로 동전을 하나씩 세어보는 버릇이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개수를 한 번 더, 천천히.
동전을 세는 동안에는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됐다.
방학이면 할머니와 함께 큰아버지 댁에 갔다. 동네는 갈 때마다 달랐다. 달라도 상관없었다. 짐을 풀기도 전에 오락실부터.
자전거가 있으면 타고, 없으면 걸었다. 골목을 누비다 '이쯤이면 나올 것 같은데.' 싶으면 정말로
오락실이 나타났다.
문은 열려 있는데 기계는 꺼져 있는 아침들. 전원을 넣고 부팅되는 화면을 기다리는 몇 초.
네오지오 로고가 떠오르는 동안 동전을 손에 쥐고 서 있었다.
서두르면 안 됐다.
로딩이 끝나기 전에 넣으면 기계가 동전만 삼키고 인식하지 못했다.
몇 번의 실패 끝에야 배웠다.
로고가 완전히 사라지고 타이틀 화면 특유의 사운드가 울리면 그제야 동전을 밀어 넣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시간의 오락실은 냄새부터 달랐다.
담배 냄새가 벽에 배어 있었고, 형광등 몇 개는 늘 나가 있었다.
화면 앞에 혼자 서서 캐릭터를 고르는 동안에는 조이스틱 소리도 버튼 소리도 없는 정적.
정릉에서는 언덕길을 내려오면 바로 시장이 펼쳐졌다. 입구에는 생닭을 파는 가게가 있었고,
그 옆에 내가 좋아하던 만두가게가 붙어 있었다.
200원에 만두 한 개를 샀다. 이 손 저 손으로 옮겨가며 호호 불어 식히다가 계단을 몇 개 내려가면
지하 오락실이었다.
정면에는 이미 더 킹 오브 파이터즈 94를 하는 친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안쪽에는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의 주인 할머니가 오늘도 꾸벅꾸벅 졸고 계셨다.
킹오파. 사람이 몰리는 시간이면 기계 앞에 동전이 탑처럼 쌓였다.
이기는 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진 사람은 순서를 기다리며 동전을 하나씩 얹었다. 내 차례가 올 때까지 그 탑이 한 칸씩 낮아지는 걸 지켜봤다.
대전이 붙으면 뒤에 서 있던 아이들 사이에서 탄식이나 감탄이 터졌다. 콤보가 이어질 때 나던 특유의 타격음, 라운드가 끝나고 승자 이름이 화면에 뜨는 짧은 정적.
그 속에서 다음 도전자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 보면 말투에 놀림이 섞이는 애들도 있었다.
얍삽이도 그중 하나. 작은 발로 연타를 넣어 흐름을 끊었고, 지는 애들이 동전을 다 쓸 때까지 옆에서 웃었다. 그 친구와는 워낙 자주 붙어 서로의 패턴을 다 외울 지경이었다. 승률은 반반.
어느 날은 뒤로 서너 명이 구경하러 모였다. 시작하자마자 얍삽이가 세게 밀어붙였다.
작은 발로 흐름을 끊으려 했지만 패턴은 이미 손에 익어 있었다. 내가 이겼다.
지는 애들 옆에서 얍삽이가 웃던 그대로, 나도 얍삽이 옆에서 웃었다.
얍삽이는 치사하게 했다며 화를 냈다. 조이스틱과 버튼을 거칠게 내려치던 손.
얍삽이는 학원 갈 시간이라며 가방을 메고 나갔다.
그러고는 한 명씩 집으로, 학원으로 빠져나갔다.
기계 앞에 쌓였던 동전탑이 하나둘 사라졌다. 오락실은 금세 한산해졌다.
안쪽에는 여전히 졸고 계신 주인 할머니뿐.
남은 동전을 밀어 넣었다. 캐릭터를 고르는 시간이 길었다. 대충 하다 끝내고, 나도 오락실을 나왔다.
계단을 올라오니 해가 지고 있었다.
그 무렵부터 동네에 피시방이 하나둘 생겼다.
처음에는 오락실에 가던 길에 피시방 앞을 지나쳤다. 유리문 너머, 나란히 앉아 화면을 보는 사람들. 빈자리에 앉는 일에는 순서가 없었다.
자리에 앉으면 화면 한구석에서 남은 시간이 숫자로 줄어들었다. 숫자가 하나씩 사라지는 동안 게임은 계속됐다.
하루에 열 판씩 하던 게임이 대여섯 판으로, 대여섯 판이 한두 판으로.
손안에서 동전을 굴리며 개수를 확인하던 그 몇 초.
필요 없어졌다.
그러다 오락실에 가자는 말 대신 피시방에 가자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누가 이겼는지, 누가 다음인지 묻지 않아도 되는 자리들만 남았다.
얼마 전 편의점에서 펩시 제로 라임과 얼음컵을 사려다 지갑을 안 들고 나온 걸 알았다. 주머니에 있던 돈으로 계산하고 나니 동전 몇 개가 남았다.
주머니 속에서 찰랑거리는 동전을 하나씩 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