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게임에도 마음을 터놓을 사람 한 명은 필요하다

전장 속 의지할 동료 한 명의 힘

by버블버블

동료 선생님들과는 철저히 비즈니스 관계라고 생각하는 나는, 개인적인 시간을 그들과 보내는 일이 별로 없다. 학기에 한 번쯤 젊은 선생님들끼리 모이자는 얘기가 나오지만, 그마저도 적당히 둘러대고 빠지는 일이 많다. 그 자리에서 내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학교에 있으면 갑갑하고, 스스로 수동적인 인간이 된 느낌이 들어요. 그런 내 모습이 싫어서 집에 가면 뭐라도 돌파구가 될까 싶어 내도록 글을 써요. 매일 칼퇴하려고 쉬는 시간이고 점심시간이고 자리에 앉아서 업무를 쳐내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들이 매일 하는 티타임에 동참할 여유가 없는 거고요, 종종 제안하는 저녁 약속에도 가지 않는 거예요. 집에 가서 글을 써야 하거든요. 우리가 함께 속해 있는 이 집단을 탈출하기 위해.'


이렇게 얘기하면 그들이 무슨 반응을 한단 말인가. 함께 일하는 동료가 우리 온라인 게임이 너무 싫다고, 견딜 수가 없어서 퇴근 후에는 탈출구를 찾느라 바쁘다고 하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뭐가 그렇게 힘들어요?”


하지만 우리는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인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그래도 올해 잘 견디면 내년엔 괜찮은 애들 만날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한 해 잘 넘기고 나면, 그럼 괜찮은 건가요? 내후년에는요? 이걸 몇십 년은 더 해야 할 텐데, 매년 운이 좋기를 바라며 가까스로 버티는 게 잘 사는 방법일까요?


물론 여기까지 말하지는 않겠지. 아마 그 전에 정적이 흐를 것이다. 다들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며 내 눈치를 보겠지.


그냥 일에 찌들어 지쳐버린 나의 상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8년간 학교에서 동료들과 얘기를 나눠온 데이터가 있다. 내가 솔직하게 말하면 보통 분위기가 싸해졌다. 다들 조심스러워서 그런 건지,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결과값은 대체로 그랬다.


내가 만난 선생님들은 대체로 학생들을 위해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할 의향이 있었고, 관리자의 말에도 웬만하면 따르는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가장 중요하다. 교사를 보호하기는커녕 학부모 편에 서서 되레 교사를 압박하는 관리자의 말을 들을 생각이 별로 없다. 힘들어 죽겠는데, 수틀리면 그냥 그만두지 뭐. 속으로는 그런 생각도 한다.


물론 다른 선생님들이라고 다 괜찮아서 묵묵히 일하는 건 아닐 것이다. 나처럼 말을 안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다들 별말 없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꾸 나 혼자만 못 견디는 것 같다. 같은 일을 하는데 나만 이렇게 힘든가? 이런 부당한 대우가 다들 괜찮은가? 아무도 문제 삼지 않으면 나도 괜찮아야만 할 것 같다.


그래, 얘기해서 뭐해. 그냥 묵묵히 일하고 입을 닫자.


그래서 학교에서는 필요한 말만 한다. 슬롯생활도 필요한 말에 들어가므로, 선생님들이 던진 농담에 웃고 사근사근한 태도를 유지한다. 학생들에게는 졸지 말라고 재밌는 얘기도 해준다. 하지만 내 속내까지 꺼내지는 않는다. 그랬을 때 이 집단에서 받아들여질 거라는 기대가 별로 없다.


돈 벌려고 다니는 온라인 게임에서 친구 만들어서 뭐해. 온라인 게임에서 가면 쓰는 건 오천만 한국인이 똑같을걸. 그런 욕심까지 부리는 건 배부른 소리야.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마음 편했다.


그런데 오늘, 학교 선생님들과 단체로 연수를 나갔다가 뜻밖의 시간을 보냈다.


연수를 마치고 여느 때처럼 집으로 향하려는데, 2학기에 새로 오신 기간제 선생님이 요 앞에 유명한 커피집이 있다고 하셨다. 집에 가서 바로 글을 써야 하는데. 잠깐 망설였지만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길래 커피라도 마셔볼까 하고 따라갔다.


그런데 웬걸, 웨이팅 줄이 늘어서 있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줄에 합류했고, 둘이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단둘이 길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었다. 선생님은 본인이 사실 임용고시를 준비 중이라며, 예전에 화장품 방문판매부터 마트 채소 판매까지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해봤다는 이야기를 줄줄 하셨다. 그러다 학교 얘기도 나왔다.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중학교에 오니 너무 힘들다고. 시수도 많고, 애들 생활지도도 만만치 않다고.


그 얘기를 듣는데 왠지 모르게 용기가 났다. 나도 힘들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고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진실의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갑자기 내 얘기도 와랄라 해버렸다.


대학원 파견을 다녀오면 교사를 계속하든 박사 루트를 타든 결정이 날 줄 알았는데, 돌아와 보니 여전히 모르겠고 학교는 너무 힘들다는 얘기. 우리 반 학부모가 전화해서 내게 냅다 쌍욕한 얘기. 올해 처음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했고 약도 먹고 있다는 얘기. 그래서 뭐라도 탈출구를 찾으려고 퇴근하면 내도록 글을 쓴다는 얘기까지.


얘기하면서도 생각했다. 이래도 되나? 학교 선생님한테 이런 얘기 해도 되나?

평소 같으면 목까지 차올라도 참았을 이야기들이었다. 한 시간가량 수다를 떨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희한하게 마음이 좀 개운했다.


나는 온라인 게임에 있는 사람들이 내 마음까지 알아주길 바라는 건 이기적이고 유치한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직을 하고 싶으면 혼자 알아서 준비하면 되지. 일이 힘들다고 티 내고 징징대는 건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거라고.


그런데 나는 생각보다 많이 털어놓고 싶었나 보다. 내 상황을 모두 아는 온라인 게임 사람에게.


오늘 한 얘기는 서로 비밀로 하자고 하고 헤어졌다. 물론 비밀로 남으면 좋겠다. 하지만 혹시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간다고 해도, 오늘 얘기한 걸 후회할 것 같지는 않다. 평판이야 뭐, 이미 MZ에 칼퇴요정으로 소문나 있는데.


매일 출근하는 회사에 내 속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홀로 싸우던 전장에 내 편이 한 명 있는 느낌이 든다. 늘 솔직하고 싶었는데, 사람들의 의아한 반응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내일도 학교에 가면 할 일이 쌓여 있을 것이고, 나는 칼퇴를 위해 쉬는 시간에도 부지런히 업무를 쳐낼 것이다. 그래도 이제 학교 안에 내가 왜 그렇게 집에 가려고 하는지 아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웃고 농담하며 일하는 와중에도 사실은 꽤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얘기해준다. 대견하다, 잘하고 있다. 힘든 게 당연한 거다.

오늘은 그 말이 평소보다 조금 더 믿긴다.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힘들어하는 내가 이상한 건 아니구나.

그래, 난 오늘도 수고하고 고생한 게 맞아. 토닥토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