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대가

검색도 예약도 없이 들어간 동네 미용실에서

by버블버블

나는 트렌디, 얼리어답터 같은 단어들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AI처럼 직무와 연결된 트렌드는 해야 하니까 열심히 따라가지만, SNS에서 핫플이나 맛집을 써치 하는 일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미용실도 비슷하다. 어느 미용실이 유명한지 찾아보고, 후기 사진을 비교하는 일부터 피곤하다. 예전에는 집 앞을 지나다니다 동네 미용실에 불이 켜져 있으면 들어가 머리를 자르곤 했다. 대부분의 동네 미용실이 그렇듯, 사장님의 이름을 건 ㅇㅇㅇ 미용실이었다.


요즘은 새치 염색도 집에서 혼자 하니 미용실에는 머리가 너무 길어졌을 때만 간다. 마침 숱도 좀 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주말에 혼자 글을 쓰러 간 외진 카페 바로 앞에서 미용실을 발견했다. 약간 허름해 보이는, 역시 사장님의 이름을 건 미용실이었다.


저런 미용실은 예약을 안 해도 되겠지?


내가 미용실에 자주 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예약하기가 귀찮아서다. 우리 집 주변의 미용실들은 대개 노블레스, 프리미엄 1인 헤어숍 같은 삐까번쩍한 이름을 달고 예약제로 운영된다. 나 같은 P 성향의 인간은 머리를 언제 자르고 싶어 질지 모르는데, 언제 예약해서 언제 방문한단 말인가. 자르고 싶을 때 당장 잘라야지.

이렇게 낯선 곳에서 눈에 들어왔으니, 저 미용실이 오늘 나의 운명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깔끔하게 차려입은 노부부가 손님 두 분의 머리를 다듬고 계셨다. 남자 사장님은 각 잡힌 정장을 입고 가위질을 하고 계셨고, 여자 사장님은 멋을 낸 꽃무늬 원피스 차림으로 드라이를 하고 계셨다.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가게를 운영하셨을 것 같은 포스가 있었다.


잘 골랐는데?


손님들은 사장님 내외와 담소를 나누다 떠나셨고, 내 차례가 되었다.


“머리는 묶을 수 있게 해 주시고, 숱 좀 쳐주세요.”


사장님은 옷차림만큼 각 잡힌 말투로 “네, 알겠습니다” 하셨다. 그리고 내 머리를 조심조심 빗어 모아 잡으시더니, 부엌가위처럼 생긴 커다란 가위로 한 번에 싹뚝 자르셨다.


싹뚝?

뭔가 머리가 너무 가벼운데?


거울을 보고 심히 당황했다. 가위질 한 번에 갑자기 똑단발이 되어 있었다. 얼굴이 동그래서 평생 긴 머리를 고수했는데, 거울 속의 나는 똥그란 찹쌀떡 같았다.


오…… 이거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

근데 이미 잘렸는데 말해서 소용이 있나?


묶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는데. 그래도 지금 말씀드린다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주워다 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할까? 말까. 말할까?


백 번쯤 고민하는 사이 사장님은 커트를 마무리하셨다. 내 머리카락이 잔뜩 붙은 커트보가 걷혔다.


“마음에 드세요?”


으음…….

그냥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감사합니다, 하고 결제한 뒤 미용실을 나섰다.


그냥 액땜했다고 생각하자. 머리가 확실히 가볍긴 한데? 상한 부분도 다 잘라냈고. 감고 말리기도 편하겠네.


그렇게 좋은 점을 찾아보려고 한다. 어차피 당분간 이 머리로 살아야 하니까. 길가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아직 초코송이 같고 웃기긴 하지만, 이런 낭만에는 이 정도 위험이 따르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런 배드엔딩을 겪고도 ‘다음에는 꼭 미리 알아보고 예약해야지’라는 교훈은 생기지 않는다. 나도 쓸데없는 고집이 있는 모양이다. 지금 머리를 자르고 싶고, 마침 눈앞에 미용실이 있으니 들어가는 것. 나는 이런 게 좀 좋다.


물론 예쁘게 잘리면 좋지. 그래도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 지를 먼저 따지느라, 내가 당장 하고 싶은 일을 매번 미루고 싶지는 않다. 머리 정도는 그냥 내키는 대로 잘라도 되지 않나. 좀 이상하면 어때. 물론 거울을 볼 때마다 잠깐씩 마음이 바뀌기는 하지만.


나는 아마 다음에도 동네 미용실 근처로 발길이 닿으면, 예약 없이 룰루랄라 들어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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