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담배를 이해했다.

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by서주양


배꼽 한 뼘 아래, 골반을 중심으로 22센티미터의 선이 그어졌다. 열두 살에는 담임선생의 차별로 인해 보이지 않는 등급이 이마에 낙인처럼 찍힌 것만 같더니, 서른일곱에는 자궁과 이별한 자리에 붉은 선이 화인처럼 남은 것이다. 수술 자국은 마치 사랑받지 못해 생긴 결핍 같다. 평범하게 사랑하고 남들처럼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다면, 내 몸에 22센티미터의 흉터는 남지 않았을까.


아랫배는 자궁과 난소, 나팔관까지 싹 도려내어져 텅 비어버렸다. 평생을 괴롭혀 온 생리통과 작별하고 '조기 폐경'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뭔가 지긋지긋하게 날 괴롭히던 폭력적인 남편이 드디어 죽었는데, 왠지 모르게 눈물은 나는 그런 느낌이랄까.


하지만 폐경여성이 겪는 무력감이나 우울감이 날 완전히 덮치지는 못한다. 왜냐! 수술하고 한 달 뒤, 경순이 배를 가르고 구원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배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고 붉은 장미가 만개하는 싱그러운 계절에 여름아기가 태어났다. 아기의 이름은 지온이다. 지혜롭고 따뜻하다는 뜻이다. 물론 대모인 내가 지었다. 나는 경순이가 산후조리원에 있는 동안 이층 살림집을 아기를 위한 맞춤형 대공사에 들어갔다. 수술받고 받은 보험금을 몽땅 쏟아부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낡은 방충망은 전부 걷어내고 초미세먼지까지 걸러주는 미세먼지 차단용 방충망으로 화장실과 주방의 작은 쪽창까지 모두 교체했다. 그렇게 안방은 말 그대로 ‘아가 방’으로 대변신! 노란색 친환경 도배지와 하얀색 리넨 커튼, 아기 이불과 베개까지 모두 오가닉으로 채웠다. 주변에서는 '유난 발광'이라며 흉을 봤지만, 신생아실에서 갓 태어난 지온이를 품에 안는 순간 내 생명의 절반이 아기에게로 훌쩍 옮겨간 듯한 기묘한 경험을 했다. 그건 아마도, 어떤 모성애 못지않게 진하고 뜨거운 감정일 거라고 나는 자부한다.


그리고 살림집만큼 큰 변화를 이룬 곳은 옥상이다. 경순이와 나를 대신해 바카라방 일을 돕던 가을 할머니가, 그동안 창고처럼 방치되어 있던 옥상을 정리하고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 것이다. 부모님은 평소 식탁에 오를 채소들만 소박하게 키우셨는데, 가을 할머니는 구역을 야무지게 나누었다. 1 구역은 향긋한 꽃밭으로, 2 구역은 상추·고추·토마토 같은 일상 채소로, 3 구역은 넝쿨이 지는 호박으로. 이렇게 꾸며 놓으니 옥상 한쪽을 쭉 둘러싼 텃밭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그 옥상의 활기에 탄력을 받은 경순과 나는 창고에 수십 년간 박혀 있던 짐들을 과감히 내다 버렸다. 짐을 걷어내고 텅 비워진 옥탑방은 옥상 텃밭만큼이나 넓고 훤했다.


- 현조야, 우리 여기에 뭔가를 만들자!


경순의 적극적인 행동력으로 당장 도배와 장판을 새로 하고, 작은방과 주방을 나누던 애매한 가벽까지 허물어버렸다. 벽을 걷어내니 공간은 훨씬 시원하게 트였다.


- 요즘 바카라 많이 들어오잖아. 바카라방 창고에 쌓아둔 바카라들 헌바카라방에 진열하자.

- 좋아! 손님들이 다양한 바카라을 찾으면 옥탑방으로 올려 보내지 뭐.

- 그럼 아예 잘 팔리는 대중적인 서적은 1층 바카라방에 두고, 좀 마니아적인 서적은 옥탑방에 진열할까?

- 옥탑방에 둘 바카라장이 꽤 필요하겠는데?


이 모든 것이 두 달 만에 이루어졌다. 한 명은 아랫배에서 자궁을 도려내고, 한 명은 생명을 낳았는데 우리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우리 둘을 걱정하는 가을 할머니만 어미새처럼 열심히 보양식을 날라다 주셨다.


- 현조야, 수술 자국 만지면 아프지? 배 만지면 내 배가 아닌 것 같아. 고무 같애…

- 근데 수술 자국 부어오른 건 언제 가라앉지?

- 나도 모르겠어. 복실이 때는 자연분만이었잖아. 나도 수술은 처음이라...


흉터 동지 경순이가 자신의 아랫배를 슥슥 문지르다가 내 아랫배를 쳐다보더니 배를 움켜쥐고 픽 웃었다.


- 야야야 웃웃 웃지 마! 아직 웃으면 배 아프다고!


그 말이 도화선이 되어, 우리는 서로에게 그만 웃으라 짜증을 내면서도 터져 나오는 웃음보를 멈추지 못했다. 웃음을 참지 못해 고문을 받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아픈 배를 움켜쥔 채 그런 엉뚱한 생각까지 했다. 그날의 장면을 회상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입안이 간지러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현조 양? 뭘 그렇게 실실거리고 서 있어?"


넝쿨 진 호박잎을 솎아내면서 가을 할머니가 따라 웃었다.


"아니요... 경순이랑 있던 일 생각하다가 웃겨서요.."


나오지 못한 웃음기를 털어내며 가을 할머니를 도와 숨어있는 애호박을 찾아 비틀었다.


"두 사람 보면, 내가 다 흐뭇해. 토닥토닥 얼마나 재밌어."

"뭐 확성기 삼총사는 남편 없는 미혼모랑 자궁 없는 노처녀가 궁색을 떤다고 뒷담 하던데요?"

"에에? 말을 뭐 그렇게 밉게 하누... 쯧쯧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가을 할머니를 바라보며 확성기 삼총사 욕을 더 하려다가, 나비 새끼는 잘 크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개나리랑 진달래는 잘 커요?"

"그러엄! 고 녀석이 얼마나 예쁜 짓을 하는지. 녀석 없이 어떻게 그 큰집에 살았나 몰라."


나비가 봄에 낳은 새끼 중 두 마리를 입양한 가을할머니가 흙이 묻은 손으로 우아하게 입을 가리며 웃는다. 마치 유럽 어딘가 전원이 아름다운 저택을 가진 마담처럼 보인다. 나비는 총 네 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안타깝게도 한 마리는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두 마리는 가을 할머니가 품었다. 그리고 남은 한 마리를 데려간 이는 바카라방의 단골손님이었다. 군대에서 갓 제대한 복학생으로 우리는 그 청년이 과연 생명을 바카라임질 자격이 있는지 엄격한 심사와 몇 차례의 까다로운 인터뷰를 거쳤다.


- 우리 누룽지 무지개다리 보내고 상심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다신 안 키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룽투가 우리 누룽지랑 너무 닮았습니다. 아무래도 누룽지가 누룽투로 다시 환생한 것이 확실합니다!


치즈색 털을 가진 나비의 막내에게 이미 누룽투라는 이름가지 지어놓은 군인 청년은 심사를 볼 때마다 빈 손으로 오지 않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었다. 청년이 사 온 과자를 씹어먹으며 물었다.


- 누룽지가 나비새끼로 환생했다는 증거는?

- 저만 보면 웃습니다!


고양이가 웃는다니, 청년의 정신이 이상하다 판단하여, 나는 불합격 판정을 날렸고 경순이는 신중하게 청년을 바라보았다.


- 아아 잠시 만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그럼 마지막 질문! 혼자 살아요?

- 친형이랑 같이 살고 있습니다!

- 형 직업은?

- 꽤 잘 나가는 웹툰 작가입니다! 저보다 누룽투에 입양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 그 형님 직업이 작가면... 매일 집에 있겠네요?

- 네 그렇습니다!


다음 날, 웹툰 작가라는 형과 함께 헌바카라방으로 온 청년은 [누룽투]라는 이름이 박힌 이동 가방까지 챙겨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비의 막내를 바라보며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우리는 기꺼이 최종 합격 도장을 찍어 주었다. 물론 그들이 사 온 호텔 얼그레이 케이크에 현혹되어 합격시킨 건 절대 아니다. (경순이가 자꾸 “네가 얼그레이 케이크 좋아하는 걸 저들이 어떻게 알았냐”라고 물어보는 바람에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누룽투는 두 남자에게 무한한 애정을 받으며, 동부이촌동 한강이 내다보이는 고급 아파트에서 아주 행복한 묘생을 보내는 중이다.


"현조 양? 누룽투 보호자 형님이 유명한 작가라면서?"

"네 그렇다네요? 덕분에 저도 요즘 웹툰을 보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웹툰을 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누룽투 집사들에게는 끝내 함구했다. 오프라인 서점의 적이라며 누룽투의 큰 집사에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낸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종 놀러 오는 누룽투의 집사들은 그럴 때마다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어댄다.


"그래도 요즘 손님이 늘었어. 다행이지?"

"우리가 헌바카라방이면서도 관리를 잘해서 바카라들이 거의 새 바카라 같잖아요. 게다가 유리병에 사탕이랑 시집을 담아 파는 게 꽤 쏠쏠해요. 원래는 화이트데이 깜짝 이벤트로 시작한 건데, 평소에도 많이 찾더라고요. 특히 생일 선물로 잘 나가요."

"나도 경순이랑 현조 알기 전에는 그냥 새 서점만 갔지. 헌바카라방은 처음이었는데, 이거 은근히 매력 있네."

"저희가 헌바카라 정리하면서 바카라에 꽂혀 있던 전 주인의 물건이나, 전 주인이 써놓은 글귀들을 웬만하면 그대로 두고 팔거든요. 어떤 오래된 소설바카라에서는 빛바랜 연애편지가 나오기도 하고요. 잘 말린 낙엽이나 네잎클로버, 혹은 작가 지망생이었던 사람이 적어 둔 것 같은 멋진 시도 발견돼요. 심지어 단종된 사탕 껍질이 꽂혀 있는 것도 재밌어서 그냥 팔아요."

"아하, 그래서 바카라방 앞에 [보름달 헌바카라방에는 추억이 숨어있어요]라고 쓰여있는 거구나?"

“아니, 경순이가 손님들한테 자꾸 ‘바카라을 보시다 보면 추억이 숨어 있어요’ 하길래, 매번 귀에 박히도록 듣기 지겨워서요.”


괜스레 수줍어 말끝을 흐리는 나를 보며 가을할머니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 고운 웃음 위로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거품처럼 떠 있었다. 마치 그림을 보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그리고 나의 아기를 떠올렸다. 요즘 내 심장을 말랑하게 만들어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든 작은 천사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이면, 아침저녁으로 산바카라을 할 것이다. 분기별로 여행도 갈 것이다. 아기에게 많은 것을 보여줄 것이다. 넓은 세상을 자유롭게 수영하듯 살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너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그러다가 거친 파도가 덮쳐 세상의 바다 밑으로 빠지게 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구할 박현조가 있다는 것도 알려 줄 것이다. 속으로 그런 비장한 다짐을 하고 있을 때, 가을 할머니가 내 팔을 잡았다.


"현조 양! 밑에서 경순이가 부르는 것 같은데?"


귀를 기울여 보니 과연 경순의 목소리가 들렸다. 번뜩, 방에 휴대전화를 두고 온 것이 떠올랐다.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불안한 염려가 덮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무 급하게 일어난 바람에 무릎에 포개어 놓았던 애호박이 데구루루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때, 옥탑 입구에 경순이가 나타났다. 잠에 덜 깨어 예쁜 눈을 깜빡이는 지온이를 품에 안은 채였다.


“현조야... 나 이젠 바카라방 내려가야 해.”

“야야! 햇살이 너무 강해! 아기 데려오면 안 된다고!”


오두방정을 떨면서 아기에게로 달려갔다. 시선은 아기에게 고정되어 있었으나, '또 지랄이네' 표정을 짓고 있는 경순이가 곁눈으로 보였다. 앞으로 바짝 다가선 내게 지온이를 건네려는 경순에게 면박을 날리면서 애써 음성을 낮추고 말했다. 나는 지온이 앞에서는 목소리를 절대 높이지 않기 때문이다.


"야아... 나 애호박 따서 흙투성인데, 지온이를 안기면 어쩌냐?"

"현조야... 흙좀 묻으면 어때서.. 애들은 흙도 만지고 그러고 큰 거지..."

"이이! 무식한! 너 가만있어!"


나는 주눅이 든 경순이를 뒤로 하고, 수시로 비치된 소독젤을 손바닥에 쭉쭉 짜서 빠르게 비벼대면서 2층 현관 앞에 놓아둔 유모차를 들고 올라갔다.


"여기 태워! 아기 목 잘 잡고! 목 잘 잡으라고!"


내 눈치를 보면서 유모차로 아기를 누이는 경순이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


"에이고 누가 보면 현조가 낳았는 줄 알겠어."


잎이 누렇게 탄 호박잎을 떼어내는 가을 할머니가 한마디 했다. 그러자 경순이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빈 입술만 달싹였다.


"뭐! 너는 할 말이 없어! 저번에는 내 등에 아기 업히려고 했지?"

"그건 네가 등에 업고 싶다고 했으니까..."

"지금은 등에 업히면 안 된다니까? 좀 더 크면 업는 거지!"

"네가 어머님 등 얘기를 계속하니까...."

"어머님 등 얘기는 뭐야?"


가을 할머니가, 바닥에 쌓인 호박넝쿨을 한쪽으로 치우면서 물었다.


“아기 때 말이에요. 제가 너무 울보라서, 엄마가 늘 엎고 다녔거든요?”


서울 중랑구 묵동이라는 작은 마을에는 울보로 소문난 아기가 살고 있었다. 밤낮없이 우는 통에, 어린 엄마는 늘 아기를 등에 업고, 얇은 카디건을 머리끝까지 씌운 채 부족한 잠을 재우려 동네를 돌곤 했다. 어느 날, 아기는 카디건 구멍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모래알로 변해서 엄마 등에 박히는 것을 보았단다. 노란 햇살이 작은 조약돌처럼 박히다가 모래처럼 흩어지는 것이 신기해서 엄마 등을 콕콕 찔러 햇살을 잡으려 했단다. 엄마 등에 박힌 모래햇살을 콕, 찍으면. 반짝이는 모래알이 작은 손톱 위로 옮겨가는 것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더군다나 모래햇살을 찌를 때마다 엄마가 몸까지 흔들며 노래를 불러주니 놀이기구라도 탄 것 같았겠지. 아기는 성인이 되어서도, 기억하고 있단다. 엄마의 등과 카디건 안에서 부서지던 모래햇살과 자장가를. 그 안에서 아기는 안전했고. 어른이 되어 세상살이가 무서워지면, 그때 모아놓은 기억으로 안전함을 느낀다고 한다. 이 스토리는 박현조의 실화가 되시겠다.


“지온이가 따뜻한 추억이 많은 어른이 되면 좋겠어요. 그래서 많이 업어 주려고요.”

“어머나! 현조 양은 그게 기억이 나? 엄마 등에 업힐 때면 꽤 어렸을 건데.”

“이상하게 기억이 나더라고요.”

“신기하죠? 할머니? 그래서 제가 현조 등에 지온이를 업히려고 했더니.. 난리난리를...”

"에잉.. 아직 업힐 나이는 아니지. 목을 가눠야 엎는 거야. 그러다 큰일 나."

"들었지? 이 무식아!"

"무식이라고 그만해... 나 헌바카라방에서 바카라을 얼마나 많이 읽는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시원하게 웃는 가을 할머니 옆으로 여름 바람이 풀잎을 스치며 노래 한 구절 남기고 간다. 사르륵, 사르륵. 옥상은 푸르게 빛나고 있다. 지금 행복한 이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며 옥상정원을 구경하는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 이젠 바카라방 내려가도 되지?"

"예영이 없어?"

"애인이랑 데이트 나간데."

"에이고 기어이 그 남자랑 사귀는 거야?"

"지금 반찬사장 딸 얘기 하는 거야?"

"네 할머니..."


김예영은 이촌동 확성기 일인자 반찬가게 사장의 외동딸이다. 대학을 졸업한 지 꽤 되었지만 아직까지 백수로 지내고 있다. 얼마 전 들어간 회사를 때려치우고 집에서 쫓겨나 바카라방 소파를 침대 삼아 지내고 있다.


“예영이가 애인이 있어?”

"네.. 그것도 띠동갑 위에 남자래요. 결혼한다고 난리 쳐서 쫓겨났어요."

"뭐 남자 직업은 있고?"

"은행 직원이래요. 알바하다가 만났나 봐요.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 저녁에 옥상에서 삼겹살 파티 할 거예요. 그때 예영이랑 확성기 삼총사 다 오니까. 그때 자세히 들어봐요."

"아주 아침 드라마가 펼쳐지겠네?"

“나는 개나리랑 진달래 때문에 집에 가야 혀.."

"저녁 드시고 가면 좋은데"

"할머니, 제가 이따가 밥 주고 올 테니까, 삼겹살 드시고 가세요."

"그러면 나는 고맙지! 그러면 쌈 채소는 넘쳐나고, 고기만 사 오면 되겠네?”

“정육점 사장님이 갖고 온 데요. 오늘 고기 들어왔는데, 자기가 쏜데요!"

"웬일이래? 사러 갈 때는 그렇게 쫌스럽게 주면서? 그건 그렇고 예영 엄마 불판 앞에 앉히지 말어라.”

“왜?”

“예영이 다칠까 봐, 아니면 둘 다~ 다치던지.”


푸하하하하, 또 별말 아닌 거에 고개까지 쳐들며 웃는 이경순이다. 이젠 가을 할머니까지.


“나비, 외출하고 돌아왔나?”

“응, 바카라방으로 들어갔어. 소파에서 자고 있을 거야.”


우리 집 계단 밑에 사는 나비 역시 출산을 하고 얼마 뒤에 나와 같은 수술을 받았다.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안쓰러워 바카라방 소파를 내어주었다. 외출 고양이라서 나가고 싶으면 문 앞에서 야옹, 거린다. 그때는 문을 열어주면 된다. 마음껏 쏘다니다가 배고프면 들어온다.


"이층 올라가는 출입문에 고양이 문 만들까 봐... 문을 아예 열어놓기는 보안도 그렇고.."

"저 앞에 철물점 사장님한테 물어볼게."

"철물점 사장님은 보일러만 고치시는 거 아니야?"

"아니! 우주선도 만든다는 소문이 있어!"


내 말에 또 배를 내밀고 웃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아기가 누워있는 유모차를 들었다. 그러자 경순이가 손사래를 치면서 다가와 유모차에 아랫부분을 잡았다. 경순이와 둘이서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오는데 가을 할머니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명은 애를 안고, 한 명은 빈유모차를 들면 될 것을...."


그러나 경순이와 나는 못 들은 척 계단의 절반을 낑낑거리며 내려왔다. 옷에 흙이 묻은 나를 대신해 안방으로 아기를 옮겨놓은 경순이가 바카라방으로 내려갔고, 나는 부리나케 상의를 갈아입은 뒤 온도계로 물 온도를 잰 아기 욕조를 아기가 있는 방으로 가져갔다.


“쪼니, 물놀이할까? 하! 하! 하!”


너털웃음을 만들며 배를 내밀자, 지온이는 숨이 넘어가도록 까르륵 웃었다. 귀여운 두 볼이 통통하게 올라오자 내 심장은 흉골을 뚫고 해처럼 솟아난다. 아기가 나를 향해 손을 뻗어 안아 달라 보챌 때마다, 내 가슴은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 같은 봉선화가 되어버린다. 나의 여름 아기를 위해서라면, 온몸이 펑하고, 터져도 괜찮다오. 분홍 꽃물 흩뿌리며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오.


“우쭈쭈 마이 에인절.”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렸다. 혹여 내 호들갑에 지온이가 놀랄까 봐, 삐져나오는 탄성을 주먹으로 막았다. 겨우 참아낸 흥분은 뼛속까지 간질인다.


“지온이~ 사랑받기 위해~태어난 아기~”


소문난 음치 목청으로 흥얼거리며, 유튜브에서 배운 대로 아기 목욕을 시작했다.

1번. 한 손으로 목을 받치고 깨끗한 거즈 준비.

2번. 눈→코→볼→입 주위→귀 바깥쪽 순으로

3번 기저귀 닿는 부위, 항문 주변 깨끗이

4번. 감기에 걸릴지 모르니 되도록 빨리 끝낸다.


“하 하 하!”

“까르르르르, 끼아악!”


오십 일이 채 안 된 아기라고 얕보면 안 된다. 웃으며 발을 버둥거리니 목욕물 절반이 안방으로 튀었다. 여름 아기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등짝이 땀으로 흠뻑 젖어도. 청소를 다시 해야 해도. 행복하고 또 행복하다. 흥분한 아기를 진정시키고, 젖은 천으로 얼굴을 닦으려는데, 조금 전까지 참방참방 물장난 치며 웃던, 지온이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불현듯, 물속에서 졸고 있는 아기가 왜 이렇게 짠하고 안쓰러운지... 가슴이 미어져 눈물이 흘렀다. 출산은 경순이가 했는데 옥시토신은 내 몸에서 분비가 되나 보다. 가끔은 없는 자궁이 아플 때도 있다.


“너를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어! 맹세!”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것이다. 다만 너의 친부가 나타나지 않기를 밤마다 기도하는 나를 용서해 주겠니. 만약에 친부가 나타나 너와 경순이를 데리고 떠나버린다면 견딜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다. 그래서 요즘 새벽마다 기도를 하고 있다.


“제발 지온이 친부가 나타나지 않게 해 주세요. 경순이와 지온이가 평생 내 옆에 있게 해 주세요. 제발 이 기도만은 들어주세요! 다른 건 한 개도 안 들어주셨잖아요! 만약 지온이와 경순이를 내 몸에서 떼어간다면, 나는 반드시 기필코 죽어버릴 겁니다!”


집착이라고 흉을 봐도 상관없다. 순면 타월로 머리까지 감싸 안은 아기를 이불 위에 눕혔다. 엉덩이에 분을 바르고 마사지를 해주는데 창가에 스며든 햇살이 목욕물에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물결이 찰랑일 때마다 천장으로 반사된 빛이 반짝거렸다. 자연이 만든 모빌 아닌가. 아름다워서 또 눈물이 나온다. 여름 아기가 깨어날 때까지, 목욕물 버리지 말아야지. 일부러 목욕물을 흔들어 천장에 별빛이 더 반짝이게 해야지. 그러면 나의 아기가 까르르 웃겠지? 방안 가득 은하수가 흐르면 지온이가 웃고. 나는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리겠지. 배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어지고, 담장 너머 여름장미가 한가득 피어난 계절에 태어난 아기는 자면서도 배냇짓을 하며 웃는다.


배꽃처럼 예쁘게.



#작은 에필로그 1

그날 저녁, 옥탑 정원에 모인 우리는 그 재밌다는 싸움을 바로 코앞에서 관전했다. 예영이는 당장 내일 결혼하겠다고 소리를 질렀고, 예영 엄마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소리소리를 지르며, 키워준 돈을 내놓으라 울부짖다가 앞에 있던 상추 바구니를 집어던졌다. 예영 엄마를 불판 앞에 앉히지 말라했던 내 예언을 떠올린 경순이는 나를 향해 쌍따봉을 날렸다.


#작은 에필로그 2

한 달 뒤, 장마가 지나가고 매미가 지져지게 울어대는 한낮에, 헌바카라방 안으로 청첩장이 새처럼 날아들었다. 예영이는 결국 그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 그런데 신랑 될 사람과 예영이 엄마의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는단다. 신랑은 은행원인데, 버는 족족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생활비를 보내야 하는 형편이라 예영이도 일을 해야 한다. 예영이 엄마는 한 동네에 셋방을 얻은 예영이와 남처럼 지낸다. 확성기 삼총사는 예영이 엄마가 빠지면서 이인조로 활동 중이다. 삼총사가 왜 와해되었느냐고 경순에게 물으니,


“부동산 언니랑, 정육점 언니가 예영이 엄마 뒤에 있는 줄 모르고, 흉을 봤데.”


네 그럴 줄 알았다. 그 아줌씨들 한 명 없으면, 없는 사람 껌처럼 씹어대는 걸 내가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어쨌든 동네는 확성기 하나가 줄어들어, 한동안 조용했다. 며칠 뒤 동네 한복판에서 예영 엄마랑 정육점 윤기 엄마가 머리채를 붙들고 싸우긴 했지만 말이다.


#작은 에필로그 3

무더운 한여름이 한 풀 꺾이자, 선선한 가을이 찾아왔다. 그래도 한낮의 햇살은 아직 여름 기운을 품고 있어서 유모차 덮개는 반쯤만 내렸다. 모기장이 드리워진 유모차를 밀며 고수부지로 향했다. 물론 유모차 안엔 우리 지온이가 타고 있고, 그 옆에는 도시락과 돗자리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경순이가 있다. 우리는 바카라방 문을 닫고, 가까운 한강으로 소풍을 나왔다. 원래는 상주에 내려갈 예정이었지만, 허 여사가 애기 먼 길에 병난다고, 서울에 있으라고 했다.

“현조야 어제 바카라방에 들어온 바카라 확인하는데, 욕이 욕이 장마다 쓰여있는 거야!"

"무슨 욕이?"

"뭐 나쁜 놈 죽일 놈 등등등... 근데! 마지막장이 압권이었어."

"뭐! 뭐! 듣고 보고 못한 욕이 쓰여 있어?"

"아니... 너를 많이 사랑한다,라고 쓰여있어."

"하아... 애증이구만... 근데 그 욕이 장마다 쓰여있으면 어떻게 지워? 그냥 받지 말지."

"아니... 바카라 내용보다 낙서가 더 재밌어."

“그럼 다행이고, 아! 그건 그렇고 자꾸 집으로 담배냄새가 들어오는데... 저 앞에 건물 짓잖아! 그 인부들이 피는 거야! 휴일 지나면 가서 항의 좀 할 거야!”

"무슨... 항의까지... 난 잘 모르겠는데.”

“아니 이이~ 거기 인부 아저씨들이 쉬는 시간에 담배 피우더라고! 그게 우리 집까지 올라오는 것 같아. 우리 쪼니 몸상하면 어쩔 건데?”

“냄새난다 싶으면 창문 닫으면 되지.”

“매번 어떻게 그래. 그리고 너는 잘 맡지도 못하잖아. 나 없을 때 담배냄새 들어와서, 쪼니 호흡기 망가지면 어쩔 거냐고! 가서 진짜 한마디 할 거야!”


별안간 걸음을 멈춘 경순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뭐! 뭐! 또 유난이라고?"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면 뭐! 빨리 가자! 좋은 자리 다 뺏기겠다."


재촉하는 나를 심드렁하게 바라보던 경순이가 늦은 걸음으로 따라왔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물결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 사이로 잠자리가 한가로이 유영하다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와 지온이는 웃었고 경순이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다방에서 일할 때 만났다던 아저씨 말한 적 있지? 공사장에서 일했었다는... 내 진짜 사랑.”

“부산으로 같이 도망가서 살다가 먼저 갔다는... 알지..”

“그 사람은 고아원에서 자랐데. 나이가 차서 원에서 나오고 막노동판을 돌아다녔다는 거야. 그 사람이 담배를 피웠거든? 뭐 내 앞에서 피지는 않았지만... 어느 날 내가 그랬어. 아저씨 담배 몸에 안 좋데요. 일찍 죽으면 나 혼자되잖아요. 그랬더니 아저씨가 막 웃더라?”


경순이는 잠깐 말을 멈추고 옅은 한숨을 깊이 내뱉으면서 텅 빈 눈으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어느 날.. 아저씨 줄 도시락을 싸서 공사장에 갔어. 점심시간이라 밥을 먹는 인부들도 있고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무리들도 있었어. 그런데 담배를 피우는 인부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나 울어버렸다?"

“왜?”

“담배 한 개비 손에 쥐고 공중으로 연기를 날리고 있는데. 모든 시름을 연기 속에 털어버리는 행복한 얼굴들인 거야. 고작 담배 한 개비에 가난함을 잊어버리는 그 소박함이 너무 슬펐어.”


등을 지고 강물을 응시하던 경순이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아저씨한테 공사장에서 쉴 때는 담배 피우라고 했어.”


덜떨어지고 바보 같은 이경순은 그렇게 담배를 이해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집 건너편 공사장 인부들에게 항의도 못한 채, 창문을 닫고 공기청정기를 새로 들여오는 것으로 마음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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