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13화. 담장 너머에도 삶은 있었다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연원(淵源)

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13화. 담장 너머에도 삶은 있었다


1980년 6월.


서울의 골목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으면 연탄을 실은 손수레가 지나갔고, 여섯 시 무렵이면 시장으로 향하는 여자들의 발소리가 골목을 깨웠다.


그 무렵 황서윤의 어머니 이정순은 이미 하루의 절반을 살아낸 사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정순은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쌀을 씻고, 된장국을 끓이고, 남편이 입을 셔츠를 다렸다. 시어머니 전옥분의 아침상을 챙긴 뒤에는 시장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정순은 시장 한쪽에서 작은 의류 좌판을 운영했다.


처음부터 옷을 팔았던 것은 아니었다.


한때는 채소를 팔았고, 명절 무렵에는 양말과 내복을 팔았다. 겨울에는 장갑을, 여름에는 얇은 면바지를 가져다 놓았다.


장사라는 것이 무엇을 파느냐보다 무엇을 남기느냐가 더 중요하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돈을 벌어야 했다.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어야 했고, 아이를 공부시켜야 했으며, 늙어가는 시어머니에게도 부족함이 없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돈을 벌수록 해야 할 일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늘어났다.


시장에 나가지 않으면 수입이 줄었고, 집안일을 하지 않으면 집이 엉망이 되었다.


어느 쪽도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정순은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단정히 묶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했다.


“오늘도 해보자.”


그 말은 누구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자신에게 내리는 작은 명령이었다.


“엄마!”


서윤이 부엌으로 뛰어 들어왔다.


“나도 시장 갈래.”


정순은 무를 썰다 말고 딸을 돌아보았다.


“학교는?”


“오늘 토요일이잖아. 학교 끝나고 갈게.”


“친구들이랑 놀지.”


“시장 구경이 더 재미있어.”


정순은 웃었다.


“구경만 하겠다는 사람이 꼭 물건을 하나씩 사달라더라.”


서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사달라고 할게.”


“정말?”


“응.”


전옥분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정순아, 데리고 가거라.”


정순이 시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시장이 얼마나 복잡한데요.”


“그래도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는 게 공부지.”


옥분은 서윤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봐라.”


서윤이 달려갔다.


“할머니.”


“시장에 가면 사람들 얼굴을 잘 봐라.”


“왜?”


“웃는 사람도 있고, 화내는 사람도 있고, 아무 말 없이 물건만 만지다 가는 사람도 있을 게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 저마다 사정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해.”


서윤은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물건 사러 온 사람들도?”


“그럼.”


옥분은 웃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넉넉해서 사고, 어떤 사람은 꼭 필요해서 사고, 또 어떤 사람은 사고 싶어도 못 사는 거야.”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못 사는 사람한테는 싸게 팔면 되잖아.”


정순이 웃었다.


“그렇게 다 싸게 팔면 엄마는 뭘 먹고 살아?”


서윤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것도 그렇네.”


옥분은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세상일이 어려운 거란다.”


그날 오후.


서윤은 어머니의 좌판 옆에 작은 의자를 놓고 앉았다.


시장에는 온갖 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양말 세 켤레에 천 원!”


“아주머니, 이거 한번 입어보세요!”


“싱싱한 오이 있어요!”


어디선가 생선 비린내가 났고, 튀김을 만드는 가게에서는 고소한 기름 냄새가 풍겼다.


서윤은 신기한 눈으로 사람들을 구경했다.


정순은 손님이 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중년 여자가 얇은 블라우스 한 벌을 집어 들었다.


“이거 얼마예요?”


정순이 가격을 말했다.


여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너무 비싸네.”


“원단이 좋아요. 오래 입으실 거예요.”


“좀 깎아줘요.”


정순은 잠시 망설였다.


“그럼 조금 빼드릴게요.”


여자는 한참 옷을 살피다가 내려놓았다.


“다른 데도 보고 올게요.”


정순은 웃으며 말했다.


“네, 천천히 보세요.”


여자가 떠나자 서윤이 물었다.


“엄마.”


“왜?”


“저 아줌마는 왜 안 샀어?”


“마음에 안 들었나 보지.”


“그런데 엄마는 왜 웃어?”


정순은 옷을 다시 개며 말했다.


“손님이 안 산다고 화내면 다음에 오겠니?”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안 오겠지.”


“그렇지.”


정순은 딸을 바라보았다.


“장사는 물건만 파는 게 아니야. 사람 마음도 알아야 해.”


서윤은 그 말을 마음속에 담았다.


한참 뒤 또 다른 손님이 왔다.


이번에는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남자 내복을 한참 만지작거렸다.


“이거 따뜻하겠네.”


정순이 말했다.


“네. 겨울에 입기 좋아요.”


할머니는 가격을 물었다.


그리고 지갑을 열어보았다.


낡은 지갑 안에는 구겨진 지폐 몇 장이 있었다.


할머니는 한참 망설였다.


“다음에 와야겠네.”


정순은 할머니를 불렀다.


“어르신.”


“왜?”


“얼마 가지고 오셨어요?”


할머니는 난처한 얼굴로 지갑을 보여주었다.


정순은 잠시 생각하다 내복을 종이봉투에 넣었다.


“그 돈만 주세요.”


할머니는 놀라 바라보았다.


“그래도 돼?”


“네. 다음에 또 오세요.”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서윤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손님이 떠난 뒤 물었다.


“엄마, 아까는 그렇게 싸게 팔면 안 된다면서.”


정순은 웃었다.


“그랬지.”


“그런데 왜 싸게 팔았어?”


정순은 잠시 생각했다.


“저 할머니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옷을 사러 오신 것 같아서.”


“어떻게 알아?”


“오래 만져보시더라.”


정순은 다시 옷을 정리했다.


“장사하다 보면 가끔 돈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일 때가 있어.”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서윤은 어머니가 장사하는 모습을 오래 지켜보았다.


집에서 보는 어머니와 시장에서 보는 어머니는 조금 달랐다.


집에서는 늘 바쁘고 피곤해 보였지만, 시장에서는 사람들과 웃고 흥정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자기 뜻을 말했다.


서윤은 그런 어머니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같은 시각.


김씨 집안에서는 김태중이 사업상 손님을 맞고 있었다.


사랑채에는 양복을 입은 남자 셋이 앉아 있었다.


태중은 차를 권하며 말했다.


“요즘 세상이 어수선하니 사업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맞은편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해 봄, 나라에는 커다란 비극이 있었다.


광주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이야기가 서울에도 조금씩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일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신문에 실리는 말과 사람들 사이에서 들리는 말이 달랐다.


누군가는 대학생들이 소란을 피웠다고 했고, 누군가는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총을 쐈다고 했다.


정확한 사정을 알기 어려웠지만, 두려움만큼은 분명했다.


태중은 목소리를 낮췄다.


“괜히 입조심 못 했다가 화를 당할 수도 있으니.”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방문 밖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태중이 돌아보았다.


“왜 그러니?”


도현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신문 좀 봐도 돼요?”


태중은 웃었다.


“우리 아들은 신문도 읽는구나.”


“네.”


태중은 접어놓은 신문을 건넸다.


“가져가거라.”


도현은 신문을 받아들었다.


그는 작은방으로 돌아와 바카라상 앞에 앉았다.


신문에는 낯선 말들이 가득했다.


비상계엄.


시위.


질서.


안정.


도현은 사전을 펼쳤다.


모르는 단어를 찾아 공바카라에 적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들은 왜 서로 싸우는 것일까.


왜 어떤 사람은 명령하고, 어떤 사람은 그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명령이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얼마 전 강인호 선생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람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로도 평가받는다.'


도현은 공바카라에 적었다.


'힘이 있는 사람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집안에서 가장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다정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박노식은 할아버지도 잘못한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도현은 연필을 내려놓았다.


세상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명숙은 친구를 만나고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애가 물었다.


“어디 다녀왔니?”


“친구 집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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