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랜드 남쪽 끝의 마을, 피틀로크리
이미 정들어버린 인버네스를 뒤로 하고 이름도 왠지 어려운 피틀로크리(Pitlochry. '크'도 아니고 '흐'도 아닌 그 Loch 할 때의 ch 발음)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대략적인 루트를 짤 때, 인버네스와 에딘버러 사이에 어디를 들렀다 갈지 지도를 보면서 궁리하다가 뭐가 있는지, 뭐가 유명한지도 모르는 상태로 그냥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며칠 묵기로 한 곳이다.
처음으로 호스텔(Pitlochry Backpackers Hostel)에 묵게 되었다. 글라스고에서 유스 호스텔에 묵긴 했지만 개인실이었기 때문에 공동실에 묵는 것은 이번 여행 중 처음이다. 근데 같은 방의 유럽의 젊은것들이 세상에서 지들이 제일 잘난 줄 알고 어찌나 떠들어대는지 벌써 도망가고 싶다. 게다가 어느 나라 애들인지 몰라도 웬 볏신같은 것들이 동양사람 싫은 티를 은근하게 내비친다.
사실 양놈들의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인종차별을 피할 수가 없는데 그래도 스코틀랜드에서는 겪어본 적 없었다. 그런 눈치 주면 내가 뭐 못 알아챌 것 같나? 못돼 처먹은 것들 나중에 우리 옆에 큰 나라 단체 관광객이 너 사는 동네에 여행 가서 길에서 ㄸ 싸기를 기원한다. 일단 그전에 목소리부터 좀 줄여!(나중엔 너무 짜증나서 돈 더 주고 1인실로 옮겼다)
B&B가 아니라 호스텔이라 이제 아침밥을 내가 챙겨 먹어야 한다. B&B에서 주는 '스코티시 브렉퍼스트'는 아무리 잘 만들어 줘도 결국 짜고 기름져서 하루 종일 속이 버거웠기 때문에 내가 직접 만들어 먹게 되어 오히려 좋았다.
야채와 과일과 토스트 두 조각, 그리고 차 한 잔으로 아침식사를 끝냈다. 근데 너무 간소하게 먹었더니 금방 배고파졌다. 어제저녁 호스텔의 부엌은 사람은 많은데 부엌은 작다 보니 아주 난장판이었다. 키 큰 양놈들 사이에서 찌부가 되는 느낌을 이겨내며 꿋꿋하게 파스타를 해 먹었다. 쌀도 샀는데 부엌에서 어정거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에딘버러 가면 거기서 밥 지어먹고 여기서는 만들기 제일 빠른 파스타로 연명해야겠다.
숙소 건너편에 스코틀랜드 티 룸 경연대회 일등 먹은 헤티스 티룸(Hettie's Tea Room)이 있었다. 가게도 아기자기 이쁘고 차도 스콘도 스프도 아주 맛있었다. 그레이트 글렌 웨이 완주한 후로 운동량이 부족했던지 아니면 이제 이 동네 음식이 입맛에 맞기 시작했는지 점점 살이 붙길래 인버네스 떠나면서 이젠 살찌는 거 안 먹고 야채, 과일만 사다 먹어야지! 라고 생각했으나ㅎㅎㅎ 스콘이 맛있어 보여서 발이 미끄러졌다. 아 게다가 경연대회에서 상 받았다고 하니 궁금하잖아? 크림 듬뿍 잼 듬뿍ㅎ~ 데헷 살은 한국 가서 빼야지!
피틀로크리는 작고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이상하게 관광객이 꽤 많이 다녔다. 아무래도 '적당히 예쁜 작은 마을' 버프 + 케언곰 국립공원 입구 + 에딘버러에서 하이랜드 가는 길목에 있다는 위치빨인 것 같다(투어버스 중간 정차 장소). 여행안내소에 가서 여긴 뭘 하면 되죠? 하고 물어보니 산바카라길 몇 군데와 박물관 그리고 근교 마을 관광을 제안했다. 휴... 내가 웬만하면 할 일 없는 동네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는데 날씨가 너무 아까워서 안내소 말대로 좀 다녀봤다.
● 피틀로크리 팰리스 호텔(Pitlochly Palace Hotel) 뮤지엄
1800년대 말에 작정하고 돈을 처들여 요양 시설 겸 숙박 시설로 만들었던 곳이고 현재는 이 동네 최고의 럭셔리 호텔. 막상 가보니 호텔이라기 보다는 큰 저택에 가까운 곳이었고 언덕 위에 있어 전망도 굿이었다. 언덕 위의 요양원이라 하면 전통적으로 얼굴이 흰 소녀가 있어야 하고(무조건 흰 손수건 대고 기침해야 함) 며칠 후에는 갑자기 안 보이고 그래야 하는데 일단 지금은 호텔이라 얼굴이 흰 소녀는 없었다.
이 호텔의 역사를 전시한 뮤지엄이 있어서 혹시 19세기 복식 그대로의 메이드나 나무로 된 여행가방을 든 벨보이가 드나들려나 싶어서 가 보니 당시 호텔 직원들의 침실이랑 부엌 같은 시설들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 이외에는 사진 전시와 짧은 영상 틀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이렇게 작은 마을의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한 큰 호텔의 역사는 꽤 매력적이었다. 아주 고급져 보여서 한번 묵어보고 싶었지만 현실은 6인실에 끼어 자는 신세ㅜㅜ
● 채리티 숍(Charity Shop) 탐방
채리티 숍은 기부받은 물건을 판매해서 수익을 자선단체에 쓰는 가게를 말한다. 우리나라도 현재는 한국형 채리티 숍의 대표인 '아름다운 가게'나 장애인 일자리 창출 + 기부물품 판매의 '굿윌스토어'(미국 Goodwill이 모델임) 등이 꽤 널리 알려져 있어 많이들 기부하고 거기서 물건도 많이 산다(보통 이사할 때 많이들 찾는다...).
영국은 2차 대전 끝난 후 옥스팜(Oxfam)이 전쟁 난민을 돕기 위해 기부받은 물건을 팔기 시작하며 채리티 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British Heart Foundation(심장병, 뇌졸중 연구), Cancer Research UK(암 치료와 신약 연구), RSPCA(영국 대표 동물단체에서 운영), Marie Curie(호스피스 지원), Age UK(고령층 지원), Salvation Army(구세군) + 동네 교회 커뮤니티에서 운영하는 지역 채리티 숍들까지 합하면 영국의 채리티 숍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거기다가 물건을 잘 안 버리는 영국인들의 습성과, 교회 중심으로 지역슬롯에서 오랫동안 존재해 온 자선 문화 등이 합쳐져 영국의 채리티 숍은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영국: 필요 없는 물건 생기면 그때그때 찾아가서 기부 / 일상적인 쇼핑 장소
한국: 이사할 때 한꺼번에 와장창 기부(버리긴 아깝고 당근 하긴 귀찮을 때 주로 찾음) / '착한 소비'에 가까운 쇼핑 장소(일상적이지는 않음)
영국의 채리티 숍에 가 보면 영국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된 물건을 죽어도 안 버리는지 실감할 수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진작 의류함에 들어갔을 낡고 보풀진 옷들과 고조할머니께서 입다가 물려주신 것 같은 스커트랑 가디건 등이 정성스럽게 손질되어 옷걸이에 걸려 있다. 인테리어 소품이나 선물용품(우리말로 "예쁜 쓰레기")들도, 플라스틱/금속 재질대로 분류해서 재활용 쓰레기장에 내놔야 할 것 같은 낡은 장식품들, 컵, 그릇, 액자, 인형 등이 소중하게 진열되어 있다.
요새는 영국도 파운드랜드(Poundland)나 B&M 같은 싸구려 물품 파는 가게들과 프라이마크(Primark) 같은 싸게 사서 입고 금방 버리는 옷가게들이 많아져서 채리티 샵 구경하는 재미가 별로 없는데 원래는 운 좋으면 진짜 앤티크 소품이나 유행 안 타는 스타일의 영국 백화점 브랜드 옷(약간의 수선 필요)도 득템 할 수 있고, 그게 아니어도 영국 할머니들이 기부한 어깨뽕 낭낭하게 들어간 재킷이나 스커트 구경하는 재미라도 있었다.
그러나 2018년에 회사 일로 영국에 다시 갔을 때 방문한 런던 근교 소도시의 채리티 샵에서는 "기부물품이 너무 많아서 정리할 사람도 시간도 없다"라며 비명을 질렀다. 창고를 흘끗 들여다보니 새것에 가까운 싸구려 장난감들과 H&M 세일할 때 사서 한두 번 입고 내다 버린 것 같은 옷들이 정말 발 디딜 틈도 없이 쌓여 있었다. 그러니 이제 영국 사람 물건 오래 쓴다는 말도 다 옛말이고 채리티 숍에서 득템 하기란 진짜 노인들만 사는 시골이나 가야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피틀로크리 읍내에는 약 4-5개의 채리티 숍들이 있었다. 대도시인 에딘버러나 글라스고에 비하면 택도 없이 적은 숫자이지만 어차피 할 일도 없어서 가게 하나하나 들어가서 아주 자세히 구경했다. 내 방에 있는 당장 안 입는 옷과 물건들만 털어도 이런 가게 한두 개는 바로 차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물자를 귀하게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물론 그 결심은 아직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 피틀로크리 댐과 수력발전소
이 동네 오면 수력발전소 꼭 보라고 해서 뭔 놈의 수력발전소가 관광거리냐... 하면서 찾아갔는데, 피틀로크리의 수력발전소는 특이하게 송어와 연어가 알 낳으러 올라오는 것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계단식 물고기 길을 터 놓은 곳이었다. 송어? 연어?(솔깃) 낚시금지 푯말도 없는데 어디 한번...? 은 농담이고 송어 연어가 나를 잡으면 잡았지 내가 어떻게 송어 연어를 낚아.
날씨는 청명하지, 공기는 깨끗하지, 댐 위에 올라가 내려다본 풍경은 눈이 시원~ 하게 탁 트여 있었다. 물고기들에게도 살기 좋은 곳임에 틀림없다.
댐 위에서 북경에서 3년 동안 영어를 가르쳤다는 애버딘 사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중국이랑 가까운 나라 사람이라 반가웠는지 나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아유 그래 북경 공기 안 좋아서 으뜨캐 사셨어요?" 하고 묻는 순간 바로 옆을 중국인 가족이 지나갔다. 아, 이제 당연한 듯이 옆 나라 까는 건 좀 조심해야겠다. 점점 대도시(에딘버러)에 가까워지고 있으니 더더욱.
할아버지는 애버딘 오면 연락 달라며 연락처를 주었다. 감사히 받았지만 난 거기 갈 생각이 없는걸... 이때 피틀로크리에서 바로 에딘버러로 직행해 버리는 바람에 애버딘, 던디, 세인트 앤드루스 같은 동쪽 해안에 있는 동네들은 아예 근처도 가지 못하고 여행이 끝났다. 물론 대학도시인 세인트 앤드루스나 좀 궁금했을 뿐 애버딘이나 던디는 가볼 생각 1도 없었지만 말이다.
작고 깨끗한 마을 피틀로크리 관광은 이렇게 하루 만에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