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틀에서 벗어나는 일

익숙함과의 진정한 결별은 '분별력'에서 온다.

byRyan Choi

주니어 시절의 나는 과거의 틀이나 정해진 방식대로 하는 일에 거부감이 있었다. 누군가 예전부터 이렇게 해왔다는 말을 들으면 괜한 반발심부터 올라왔다. 낡은 방식이 새로운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왜 굳이 옛날 방식대로 해야 하는지, 더 나은 방법이 분명 있을 텐데 왜 바꾸려 하지 않는지 답답했다. 회의 때마다 속으로 그런 말을 삼키곤 했다. 그때의 나는 틀을 깨는 것이 곧 '성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때의 나에게는 깰 만한 틀조차 없었다. 의미 있는 경험이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틀을 부정하는 건, 뭘 부수는지도 모르고 망치를 휘두르는 일에 가까웠다. 과거의 방식에는 대개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모른 채 버리면, 같은 실수를 처음부터 다시 겪게 된다. 그래서 먼저 필요한 건 충분한 경험을 쌓는 일과 그 속에서 유익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려낼 줄 아는 눈을 기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직을 하거나 부서를 옮기는 후배들에게 꼭 하는 조언이 있다. 그건 최소한 한 달은 집중적으로 기존에 해온 업무들을 파악하는 데 힘을 쏟으라는 것이다. 새로운 자리에 가면 다들 무언가를 바꾸고 싶어진다. 내 존재감을 빨리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크다. 하지만 지금의 방식이 왜 이렇게 굴러가는지 모르고 손을 대면, 대개 탈이 난다. 틀을 깨려면 먼저 그 틀이 어떻게 생겼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연차가 쌓이면서 이번엔 또 다른 문제를 마주하게 됐다. 오랜 시간 다져온 내 방식이 이제는 꽤 단단한 틀이 되었다고 믿었다. 웬만한 일은 그 틀 안에서 해결할 수 있었고, 그게 내 경쟁력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최근 주변 환경이 바뀌면서, 그 틀이 생각보다 쉽게 흔들린다는 걸 알게 됐다. 단단한 줄 알았던 틀이, 막상 힘을 받으니 수수깡으로 엮은 상자처럼 맥없이 부러졌다. 꽤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 틀을 고쳐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도 다시금 깨닫는 중이다. 조금 손보고 덧대서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있는가 하면, 아예 깡그리 부수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 상황도 있다. 문제는 그 둘을 구분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익숙한 틀일수록 아직 쓸 만하다고 믿고 싶어진다. 내가 오래 공들여 만든 것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과거의 틀을 따르는 게 가장 손쉬운 길이다. 이미 익숙한 길이고, 그 틀을 기반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에너지를 가장 적게 쓰는 방법이니까. 새로운 일이 닥쳐도 예전 방식에 대입하면 금방 답이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머리를 덜 써도 되고, 실패할 위험도 줄어든다. 무엇보다 마음이 편하다. 나도 그 편안함을 꽤 오래 누려왔다. 하지만 그 편안함이 내겐 여전히 주니어 시절과 마찬가지로 역한 거부감이 존재한다.


에너지를 아끼는 길은, 대개 생각을 멈추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익숙한 틀로 세상을 보면 새로운 것도 낡은 것처럼 보인다. 지금 상황이 예전과 다르다는 신호가 와도, 틀에 맞지 않는 정보는 자연스럽게 걸러진다. 주변을 봐도 그렇다. 여전히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새로운 것을 그 틀 안에 억지로 구겨 넣으려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러면 들어가긴 하는데, 원래 모양은 다 찌그러지고 만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새로운 것을 담으려면 틀부터 바꾸고 넓혀야 한다. 새 기술도 새 방식도, 결국 예전에 하던 그거랑 똑같다며 익숙한 칸에 끼워 맞추다 보면, 아무리 새로운 것이 오더라도, 사람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그렇다고 과거를 부정하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주니어 시절의 나처럼 무작정 틀을 거부하는 것도, 익숙한 틀에 새것을 구겨 넣는 것도 결국은 같은 문제다. 둘 모두 상황을 판단하는 '분별'이 빠져 있다.


그래서 요즘 나는 그 '분별'을 다시 연습하는 중이다. 어떤 건 고쳐 쓰고, 어떤 건 과감히 내려놓고, 어떤 건 아예 처음부터 다시 쌓기.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하고 버려야 할 때는 미련 없이 버리는 용기. 오래 써온 틀일수록 놓기가 아쉽지만 놓아야 할 때를 구분하는 힘은 결국 놓아본 경험에서 온다. 언젠가는 지금의 틀 역시도 다시 짜야할 것이다. 그때는 최소한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분별력을 가졌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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