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 색으로 물들기도 전에. 초록이 아직 남은 잎도 있고, 가장자리만 누렇게 바래다 만 잎도 있었다. 붉게 타오를 차례는 오지도 않았는데 잎들은 벌써 가지를 떠나 발밑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가을이면 기다리는 풍경이 있다. 초록이 물러난 자리에 노랑과 주홍과 붉은빛이 번지고, 나무마다 제 빛깔로 마지막 계절을 꾸미는 풍경. 한 해를 견딘 잎들이 가장 고운 모습으로 생을 마치는 때라서, 가을은 쓸쓸하고도 눈부시다고 여겼다.
올해 잎들은 달랐다. 물들 틈도 없이, 작별 인사 한마디 없이 땅으로 내려앉았다. 보여줄 마지막 모습을 채 준비하지 못한 듯, 바싹 마른 몸으로 서로 어깨를 포개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햇살은 아직 남았고 가지에는 초록이 무성한데. 조금만 더 버텼다면 선명한 가을빛을 입었을 텐데.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가지 끝에서 잎이 떨어졌고,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안타까움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잎에게도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갈증이 있었을 테고, 견디기 힘든 더위와 긴 여름이 있었을 것이다. 같은 나무에 매달려 있어도 잎마다 받는 햇살이 같지 않고, 같은 비를 맞는다고 같은 힘으로 버티지는 못한다. 멀쩡해 보이는 잎이 속으로는 오래전부터 말라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누구는 가장 환한 시절을 한껏 누리고, 누구는 꽃을 피우기도 전에 삶의 무게에 주저앉는다. 계절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지만 그 길이와 빛깔까지 똑같이 나누어 주지는 않는다. 남들에게 설레는 시작인 일을 누군가는 오래전에 접어야 했고, 누구에게는 예사로운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온 힘으로 건너야 하는 하루다.
우리는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다고 믿는다. 기다리면 꽃이 피고, 견디면 열매가 맺히고, 시간이 지나면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고. 그래서 아직 빛나지 못한 사람에게 조금만 더 애써보라고, 꽃 피우지 못한 시간을 더 기다려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삶이 정해진 순서대로만 흐르지는 않는다. 애를 써도 열매가 달리지 않는 해가 있고, 간절히 기다려도 끝내 오지 않는 계절이 있다. 누구보다 성실히 살았으면서 자기 빛깔을 세상에 내보이지 못한 채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은 덜 아름다운 것일까.
발밑의 마른 잎 하나를 주워 들었다. 한때는 나무 높은 곳에서 햇살을 받았을 것이다. 비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가지를 놓지 않았을 것이고, 수많은 아침과 저녁을 지나 나무의 푸른 시간을 함께했을 것이다. 우리 눈에 남는 것은 떨어진 모습뿐이어도, 이 잎은 제 몫의 계절을 이미 살아낸 것인지 모른다.
붉게 물들지 못했다고 초록으로 보낸 날들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아름답다 부르는 것은 마지막 순간의 화려함일 뿐, 한 존재가 지나온 모든 시간을 말해주지는 못한다.
나도 그랬다. 젊을 때는 무엇이든 이루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바쁘게 달렸다. 애쓴 만큼 결과가 따라와야 했고, 들인 시간에는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나이가 들면 마음이 느긋해질 줄 알았는데, 지나온 길을 돌아볼수록 이루지 못한 일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쓰지 못한 문장들이 마음 한쪽에 쌓였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다가도 문득, 내 빛깔을 제대로 내보이지 못한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같은 계절을 내어주지 않는다. 어떤 일은 너무 일찍 끝나고, 어떤 꿈은 너무 늦게 오고, 어떤 아름다움은 끝내 세상의 눈에 띄지 않는다. 오래 매달려 있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얼마나 화려하게 물들었는가보다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는가가 더 오래 남을지도 모른다. 아직 푸르다고 서두를 까닭도 없고, 먼저 떨어졌다고 제 삶을 실패라 부를 까닭도 없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남아 있던 잎 몇 장이 가볍게 흔들리다 땅으로 내려왔다. 나는 그 잎들을 밟지 않으려고 걸음을 옆으로 옮겼다. 쌓인 마른 잎들은 아무 항의 없이 바람이 미는 쪽으로 몸을 맡겼다. 누군가는 쓸쓸한 풍경이라 하겠지만, 내 눈에는 오래 살아낸 것들이 잠시 쉬는 모습으로 보였다.
어쩌면 모든 계절을 완벽하게 살아내려는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루지 못한 꿈을 너그럽게 바라보고, 빛나지 못했다 여긴 지난날에도 따뜻한 눈길을 건네는 일. 아직 피지 않은 꽃만 보다가 이미 피었다 진 꽃을 잊지 않는 일.
가을은 모든 잎이 붉어져야 완성되는 계절이 아니다. 어떤 잎은 눈부시게 물들고, 어떤 잎은 푸른 기운을 남긴 채 떨어지고, 또 어떤 잎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 말라 흙으로 돌아간다. 모습은 달라도 어느 한 잎이 다른 잎보다 가볍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무에는 물들지 않은 잎이 남아 있었고, 길 위에는 제 빛깔을 다 입지 못한 잎이 쌓여 있었다. 그 사이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마른 잎의 갈색 가장자리에도, 아직 푸른 잎의 여린 면에도 햇살은 가리지 않고 내려앉았다.
다 피우지 못한 꽃도, 미처 물들지 못한 잎도, 끝내 마치지 못한 우리의 시간도 그대로 귀하다. 삶은 가장 고운 빛깔로 끝맺는 경연이 아니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살아낸 모든 시간이 이미 한 생의 빛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