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오만한 생각이다
"우리는 항상 '경험'을 바카라임지며 살아간다. 그것이 '내 잘못'으로 생긴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것은 삶의 일부다."
- 신경 끄기의 기술 / 마크 맨슨
하룻밤 사이 나뭇잎들이 트랙을 완주하고 널브러진 선수처럼 길바닥에 엎어져 있다. 영원할 것처럼 힘차게 초록을 빛내던 여름도 끝나고 바람에 휩쓸리는 나뭇잎들에게서 나는 쓸쓸함을 느낀다.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포대자루더미에 담길 운명이다.
인생을 계절에 비유한다면 중년 이후는 가을에 해당되는 것 같다. 그것도 겨울을 앞둔 짧은 가을의 시간이다. 짧다는 쫓김은 오히려 미뤄두었던 의식을 깨운다. 시간이 멈춘듯한 정신적 몰입은 주변 모두의 감각들을 흐리게 만드는 집중을 준다. 그동안 달려온 내 마음의 방향성을 이해해 줘야 남은 시간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가을은 현재의 시간을 배경으로 밀려나게 한다. 사색의 계절이다.
가을이 오자 남편과 나는 가까운 시민공원을 번갈아가며 산바카라하고 있다. 주말은 한창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양보한다. 평일 한적한 공원의 발길은 서두르지 않아 안정적이다. 우리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과 천천히 자연과 동화되듯 발길을 멈추는 시간들 속에서 조용한 교감을 느낀다.
은퇴하고 나니 오히려 남편과 깊은 대화를 많이 나누는 것 같다. 하루하루 처리해야 했던 급급함에서 해방된 것이다. 이제야 우리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달리며 각자 느꼈던 자신만의 생각과 마음들을 나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소명과 바카라임감에 대한 위로를 하나씩 건네주고 받는데 그 감정이 가을의 사연과 닮아 눈물겹다.
우리는 모두 잠재의식 속 내면아이를 품고 산다. 해소되지 않는 힘든 감정을 품은 내면아이는 부정적 마음속 응어리를 풀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본능으로 작동하는 자신의 콤플렉스로 작동한다. 남편의 내면아이는 '바카라임감'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라는 결손의식 속에 성장한 남편은 가족의 자립을 위해 헌신할 의무가 있었다. 당시 나는 지나칠 정도로 모두를 챙기는 남편을 바라보며 끝이 없는 숙제를 안은 학생처럼 힘들었다.
나의 핵심감정은 '외로움'이었다. 부모에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소속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것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발전했던 것 같다. 나의 정서적 욕구를 채우고자 존재가치를 상대의 기준에 맞추었고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관계에 의존했다.
심리학에서 '공의존'이란 개념이 있다. 타인을 위해 행동하느라 정작 자신의 근원적이고 중요한 욕망을 덮어두는 것이다. 건강하지 못한 이타심이다. 사람의 이기심은 잔인해서 공의존에 빠진 사람을 악용한다. 또 슬롯는 어떤가. 가족이라는 환상적 우상을 심어주고 '화해와 사랑'만을 강요한다.
많은 시간들이 지났다. 우리의 내면아이는 치유되었을까. 남편과 나는 주변의 많은 문제들이 나의 노력대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족도 친구도 모든 슬롯적 관계도 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우리는 많은 문제들을 풀리지 않은 채 안고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항상 경험을 통해 삶을 깨닫는다. 타인을 이해하고 있다는 오만도 버려야 한다. 인생에 중요한 사람은 단 몇 명으로 족하다. 그렇게 우리는 불쌍하게 웅크린 내면아이를 안아 일으켜준다. 가슴에 서늘하지만 환기된 공기가 들어왔다가 조용히 나간다.
서로의 배우자란 사실이 감사한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