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진 시간에 뒤따라 오는 생각들
현재의 대인 관계를 자신의 과거 대인 관계의 원형에 투영해서 바라보는 경우는 매우 흔합니다. 아니,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대인 관계는 이전 관계의 영향을 받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관성의 법칙에 영향을 받는 것처럼 지칠 줄 모르고 패턴이 반복됩니다.
당신의 감정에는 당신만의 사연이 있다 / 박용철
양가 상견례가 있고 처음 맞이했던 이번 추석명절에는 예비 며느리가 인사차 방문했다. 늦겨울에 만나 봄, 여름을 보내며 사랑을 확인했고 결혼을 준비하는 두 아이들의 눈빛은 깊어 있었다. 사랑과 신뢰가 쌓여있는 커플은 성숙하고 아름답다. 몇 번의 만남을 오가며 새 가족을 수용하는 마음가짐이 다져만 간다. 나는 오래전에 막연히 가졌던 생각들이 점차 현실이 되어가는 기분이 든다.
나는 고부갈등(姑婦葛藤) 없는 화목한 미래를 꿈꾸고 있다. 시어머님과 30여 년을 함께 살며 느꼈던 크고 작은 불평등, 불합리한 사고방식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몸으로 체(體)화된 감정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느끼지 않게만 해줘도 충분히 괜찮을 것이란 자신감에서 비롯된 확신이기도 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빨리 늙고 싶었다. 계획한 대로 인생이 흘러가진 않겠지만 적어도 내 노년은 청춘보다는 나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끊임없는 일감과 함께하는 바카라임감은 내 젊음이 끝나야 종료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오래전 우연히 '소노 아야코'의 '계로록(戒老錄)_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을 읽으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었다. 그녀도 나처럼 젊음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름답게 늙고 싶어 했고 노년에 접어들면서 노년에 경계해야 할 것들을 메모 형식으로 적기 시작했다. 나는 그 기록들을 읽으면서 참으로 놀라고 존경심을 느꼈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한 억울함을 보상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다. 그렇게 악습은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가 싫어하는 인물을 어느 순간 닮아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충격은 관성의 법칙처럼 과거 대인 관계의 원형에 투영한 결과물이다. 잘 생각해 보면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인물들 대부분은 나의 어릴 적 중요 인물을 대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자바카라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실 유전적, 환경적 요인으로 습관이 된 감정의 결과물일 뿐이다.
우리는 실수 없이 멋진 인생을 살고 싶어 하지만 각성하고 상상하며 행동하지 않으면 감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나는 친정집의 부모님과 시어머님을 바라보면서 늘 마음속으로 되새긴 것이 있다. 모든 악습은 내 대(代)에서 끝내겠다는 결심이다. 나는 나이 들면 '어른다움'으로 늙어가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본다.
'소노 아야코'는 만년에 있어 갖춰야 할 네 가지를 허용(許容), 납득(納得), 단념(斷念) 그리고 회귀(回歸)라 말했고, 경계해야 할 세 가지는 노욕(老慾), 노추(老醜), 노망(老妄)이라고 적었다. 어른답게 나이 드는 것은 마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경계하고 상상하고 행동해야 가능한 자격이다.
그녀가 정리한 계로록(戒老錄) 중 내 것으로 선택한 몇 가지를 추려본다.
- 남이 '주는 것', '해주는 것'에 대한 기대를 버린다.
- 남이 해주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노인이라는 것은 지위도, 자격도 아니다.
- 노인이 됐다고 해서 타인이 공경해 주길 바라지 마라.
- 젊은 세대는 나보다 바쁘다는 것을 명심해라.
- 노후에 받아야 하는 것은 동정심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대우란 점이다.
- 혼자서 즐기는 습관을 기르자.
- 손자를 돌보아줄 것, 그러나 공치사는 하지 말자.
- 자식에게 기대는 것은 이기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부모다.
- 재미있는 인생을 보냈으므로 언제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리적 결재를 해놓자.
- 자신의 죽음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도록 노력하자.
- 죽기 전에 소품을 한 두 가지로만 간소화하자.
명절이 지나고 휴일, 가족과 편안하게 한강변을 산바카라하며 든 생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