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바카라으로부터 강화된 시력은 나를 감시 내지 주시하는 공정한 관찰자의 수준과 위치까지도 세심하게 살피기에
나도, 나의 관찰자도 함께 키워주는 도구로서 바카라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합리와 비합리의 연결을 위해
김우창교수는 비코의 견해를 가져와
'우리가 과학적인 이성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비코의 주장처럼 '공동체의 양식', 즉, 공통감각으로 인해서인데 이것이 삶의 지혜, 프로네시스나 프루덴티아에 통하고 이러한 지혜가 언어에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주)'고 말한다.
프로네시스(실천적 지혜)와 프루덴티아(신중 또는 판단적 지각)는
학자로서 내가 연구하는 중심주제이기도 하다.
글자가 가진 의미보다 훨씬 더 깊고 방대한 해석이 가능한 이 두 단어의 함축된 의미안에서
우리의 이성을 논한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바다 전체를 훑어내려는 무모한 시도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한다.)
과학적 지성에 초월된 이성까지를 망라하겠다는 무모하고 야심찬 시도이지만
무모와 야심 덕분에 우리는 비코의 견해처럼
'이성'은 과학적인 측면만으로는 부족하니 비과학적에 토대를 둔 '지혜'를 연결시켜야
좀 더 완성된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프로네시스의 비과학적인 부분이 비합리적이라는 뜻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다. 지혜라는 추상적 단어가 인류와 함께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슬롯과학의 범주에 진입이 가능하고 창의와 통찰, 직관과 같은 단어 역시 수치화될 수 없으나 슬롯과학의 범주에서 수많은 합리로서 인정받고 있다.
바카라을 읽으며 바라는 바는,
바로 이렇게 비과학적인 인간의 기능을 과학적인 합리로 연결시켜줄
'초월한 선제적 경험'을 다양하게 얻는 것이다.
간접적이지만 선경험으로 지식화된 수사적 설득에 내가 굴복하는 태도를 가짐으로써
우리는 비합리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의 합리, 즉, 초월된 이성을 얻고 쌓게 된다.
이 초월된 이성은 미세한 플랑크톤부터 거대한 흑돔고래까지, 이들의 생태계를 총망라하여
연결에 연결을 거듭한 끝에 우습게도 궁극에는 고래가 플랑크톤을 먹고 산다는 단순한 사실을,
여기와 저기가 연결되어 비과학에서 과학으로 입증된 것을 다시 비합리로 이끌어내는
변증의 논리체계를 내 이성에 장치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의 순환으로 단순한 나의 일상의 팩트가 공동체적인 의미를 찾아가는
어마무시하지만 단순한 이치를 경험으로 깨닫게 된다.
선제적경험의 축적이 누적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독서는
현상에 대한 단순한 이해관계를 파악하는 수준이었던 나의 이성의 현주소에
선제적 간접경험을 배치시키고
나의 서사인 직접경험을 보태어
이성에 혼(魂)이 실리는 초자연적인 힘을 내게 부여한다.
결국,
나의 이해수준은 해석수준으로 승격되고
해석은 현상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통찰로,
통찰은 초월적 지성, 즉 지력으로 장착된다.
바위를 깨뜨리기 위해
자신이 일상에서 접하는 사물, 대상등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이해를 통해 정신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질서잡힌 이해를 통해 또 새롭게 내게로 올 일상의 해석차원을 높이기 위해
이같은 사고의 순환을 위해
데카르트는 반복된 명상을,
에머슨은 실천의 반복과 훈련을 거론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훈련하고 반복해야 한단 말인가?
점검과 검열이다.
한마디로, 성찰이다.
성찰은 반성을 전제한 의식적 의심과 자각이다.
가슴과 언어의 결합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정신과 다리까지 모두를 검열하는 것이
진정한 성찰이다.
성찰의 반복
이를 위한 토대로서의 독서
독서를 통한 자각
일정시간의 독서가 반복되면
우리는 더 높은 차원으로 일상을 해석하고
우리의 일상을 자신의 목적을 너머 공동의 목적으로 연결시키면서
일상을 더 진실되게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자신을 탐구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난제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계란과 같이 나약한 나는 바위처럼 단단한 나의 인식을 깨뜨려 변화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체가 아닌, 퇴보다.
인식의 파괴는 새로운 나, 온전한 나, 진짜 나로의 진화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려면 '사상(思想, 논리적 정합성을 가진 통일된 판단 체계)'을 주입하면 된다.
잠재와 초월은 분명 물리와는 다른 차원의 힘이기에
지속적인 사고의 주입은 바위도 깨뜨릴 강한 힘을 갖는 훈련인 것이다.
따라서, 독서는 나를 탐구하기 위한 훈련이다.
가슴과 다리와 머리,
과학적 이성과 초월된 이성이
해석을 너머 사상으로 구축되면
지금의 나를 깨뜨릴 수 있다.
이것이 바카라이 주는 선물이며
독서의 위대함이자 독서의 이유다.
고차원적인 쾌락의 경험을 위해
독서가 주는 기대이상의 선물은 무한한 무형의 자산이다.
언어를 눈으로 접했을 뿐인데
독서가 독서를 이끌다 보면
어느 순간,
남들이 감탄하는 그 지점에서 나는 비판을,
남들이 비판하는 그 지점에서 나는 통합을,
남들이 통합하는 그 지점에서 나는 재창조를 발현한다.
나의 정신에 자리잡은 원리, 즉 대법(大法)을 기준으로
내 삶이 느닷없이 치고 들어오는, 또는 늘상 자리하고 있는 불편한 감정들 -불안, 심려, 긴장- 은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