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사야만 살 수 있는 여자를 아시오?

나이키 사이키델릭 스우시 바람막이

by이숨


딸과 함께 놀이터에 갈 때 입는 사이키델릭 스우시 로고 바람막이다. 당근 앱에서 썸네일을 보고는 너무 색감이 강한가 잠시 고민했지만, 실패할 것도 없는 가격이니 샀다. 걱정이 기우로 느껴질 만큼 데일리룩으로 잘 입고 있다. 마침 80년대 스타일로 화려한 패턴이 조각조각 들어간 트레이닝 세트를 살까 했는데 이걸로 갈음할 수 있겠다.
아이가 크게 울면 애플워치에 소음 경고가 뜬다. 저 면적의 사이키델릭함이 충격으로 다가오려면 90dB 이상으로 나를 때려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그저 온건하다고 말할 수밖에.

뉴트럴과 무채색의 계절인 가을이지만 지금 기댈 곳은 색채뿐이다. 다들 도파민 중독을 말하지만 지금 중독되기에는 쇼츠도 길다. 고채도의 색감만이 머리를 치고 지나며 잠시의 환기를 선사한다.
국내에서는 마음에 드는 진한 색감의 팔찌가 없어서, 딥퍼플 로프 팔찌를 알리익스프레스로 주문했다. 눈에 형광을 쏘아 대는 마젠타 색감의 새틴 운동화도 고민했지만 샀다. 직전 여름에는 애 낳고서야 무신사에 빠진 여자처럼 검은 옷만 입었다.

핫핑크, 마젠타, 딥퍼플. 다 연령대 있는 여자들이 불안할 때 고른다고 정평난 색들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지금은 더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도 나를 잡아 줄 수 없으니까, 내가 내 몸에 이런 걸 휘감아서 잡아야겠다. 이제는 총천연색이다.


꾸밈노동을 해 본 적이 없다.
20대 초반에는 다들 그때가 제일 예쁜 시절이라니까 안 꾸몄다. 그 뒤로는 온라인 게임 적응이 더 중요하니까 안(못) 꾸몄기 때문이다. 깔끔하게만 보이면 나머지는 일에 신경 쓰는 게 나았다. 옷은 나에게 몸을 가리고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도구였다.
물론, 너무나 당연히, 잘 입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갈망만 있을 뿐 물건 고를 줄도 몰랐다. 내 눈에 루즈핏인 옷은 부모님께 ‘돈 들여 산 남자 옷’ 일뿐이었다. 세상 모든 스웨터가 똑같고 모든 셔츠가 똑같아 보이는 걸 어쩌나. 그나마 무심한 듯 여유 있으면서도 단정한 맛이 좋아 선호했던 룩은 놈코어. 남편은 두 번째 만남에, 나름의 놈코어 패션으로 차려입은 나를 보고는 무언의 거절로 해석했다고 한다.

그랬던 어느 여자는 아이가 등원한 지 3개월쯤에 대각성의 시점을 맞는다. 자신은 딸 옷만으로 대리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계절이 바뀌어도 항상 그 옷 그대로, 눈에 안 띄는 보호색에 사는 나. 남들의 시선에서 투명해질수록 거울 속 내가 견딜 수 없이 선명해졌다. 딸은 나의 분신 같은 존재이지, 분신은 아니다.

그럼 선택해야 한다. 포기하고 입던 그 옷대로 계속 투명하게 살아갈지, 삐죽삐죽한 내 걸 찾아 나설지. 딸 옷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면 경제적이고 좋았을 텐데, 여간 아쉽지가 않네.

그래서 딸 옷을 사며 빠져든 당근 앱으로 다시 흘러갔다. 신체 사이즈가 달라져서, 추구하는 스타일이 바뀌어서 내놓은 세상의 온갖 옷이 모여 있다. 요즘은 다들 남대문으로 아동복 쇼핑을 간다. 하지만 그건 아이를 ‘지참’ 하지 않으면 밖으로 못 나가는 사람 입장에서는 명품관보다 더 고급스러운 사치이다. 지금은 온라인 동묘시장이 나에겐 수유실 완비된 백화점이다.

아이를 낳고, 나는 꾸밈취미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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