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절대적이었으나 소멸한 신들이 증명하는 종교의 자연사
지중해 동부의 작은 섬 델포이의 비탈길에는 한때 온 세상의 운명이 모여들던 신전의 잔해가 흩어져 있다. 기원전 수 세기 동안, 그리스의 황제와 장군들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앞두고, 혹은 새로운 식민 도시를 개척하기 전에 반드시 이곳을 찾아 무릎을 꿇었다.
땅의 틈새에서 피어오르는 신비스러운 가스 속에서 무녀 피티아(Pythia)가 환각에 차 내뱉는 중얼거림은 아폴론 신의 음성으로 번역되었고, 그 모호한 신탁 한마디에 제국의 흥망과 수만 명의 생사가 엇갈렸다. 아폴론의 신전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인류의 등대처럼 보였다.
그러나 서기 362년, 로마 제국의 마지막 이교도 황제 율리아누스(Julian the Apostate)가 옛 신앙을 부흥시키기 위해 델포이로 사절단을 파견했을 때, 폐허가 된 신전에서 늙은 사제가 황제에게 전한 마지막 신탁은 쓸쓸한 탄식이었다.
“황제에게 전하라. 아름다운 신전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고, 아폴론에게는 이제 머물 처소도, 예언의 월계수 잎도 없으며, 재잘거리던 샘물마저 영원히 말라붙어 입을 다물었노라고.”
한때 지중해 전역을 호령하며 제왕들을 벌벌 떨게 했던 태양과 예언의 신 아폴론은 강력한 번개를 맞고 쓰러진 것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패배해 살해당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를 부르는 인간들의 발길이 끊기고, 그에게 바쳐지던 기름과 포도주가 마르면서, 가을날 낡은 외투가 해어지듯 조용히 잊혀갔을 뿐이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오늘날의 독실한 신앙인들을 향해 허를 찌르는 질문 하나를 던진 바 있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신에 대해 이미 모두 무신론자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더 이상 바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우스에게 번제를 올리지 않으며, 아폴론의 신탁을 구하지 않는다. 오늘날 유일신을 믿는 신앙인들 역시 인류가 섬겨왔던 수천수만의 신들 중 99.9%를 전혀 믿지 않는 무신론자이며, 단지 자신이 속한 시대와 문화가 건네준 마지막 ‘단 하나의 신’만을 예외로 남겨두고 있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바알, 아스타르테, 테스쿱, 케모스, 마르두크, 케찰코아틀, 오딘, 토르, 제우스, 오시리스. 한때 그 신전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듯 떨었던 그 절대적인 신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들은 모두 침묵의 땅, '잊혀진 신들의 거대한 공동묘지'로 들어갔다. 인류 문명사는 신이 영원불멸한 존재가 아니라, 태어나고 번성하다가 환경이 변하면 자연스럽게 수명을 다하고 퇴장하는 ‘자연사(Natural Death)’의 궤적을 밟는 유한한 문화적 유기체임을 명백하게 증명하고 있다.
신들의 흥망성쇠를 목격한 가장 오래된 땅은 메소포타미아의 진흙 평원이었다.
기원전 3500년경,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인류 최초의 도시 문명을 일구었던 수메르인들에게 세상은 예측할 수 없는 공포의 도가니였다. 나일강과 달리 메소포타미아의 강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봄눈이 녹아내리면 강물은 예고도 없이 제방을 무너뜨리고 도시 전체를 진흙탕 속에 수장시켰으며, 한여름에는 살인적인 열풍과 모래바람이 불어닥쳐 모든 작물을 말려 죽였다.
가혹하고 변덕스러운 자연 앞에서 수메르인들이 발명해 낸 신들은 친절할 여유가 없었다. 바람과 폭풍의 신 엔릴(Enlil), 혼돈과 지하수의 신 에아(Ea), 사랑과 전쟁의 변덕스러운 여신 인안나(Inanna)는 인간의 행복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시끄럽게 떠드는 인간들의 소음이 짜증 난다는 이유로 대홍수를 일으켜 몰살을 시도하는 거칠고 냉혹한 지주(地主)들이었다.
수메르의 각 도시 한가운데에 솟아 있던 거대한 계단식 벽돌 탑, ‘지구라트(Ziggurat)’는 단순한 예배당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시의 진짜 소유주인 신이 거주하는 거대한 대저택이자 행정 중심지였다.
수메르인들은 스스로를 신들의 고된 노역을 대신하기 위해 흙으로 빚어진 노예로 규정했다. 시민들은 아침마다 갓 구운 빵과 술, 양고기를 제단에 바치며 신들의 분노를 달랬다. 사제들은 곡물 창고의 장부를 기록하기 위해 쐐기문자를 발명했고, 신전은 도시 경제의 모든 잉여를 집어삼키는 절대 권력의 블랙홀이었다. 당시 우르나 우루크의 시민에게 엔릴이나 인안나의 신성이 소멸한다는 것은 온 우주가 무너져 내리는 일과 같았다.
그러나 그토록 절대적이었던 수메르의 신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외적의 칼날이 아니었다. 소리 없이 대지를 잠식해 온 ‘소금’이었다.
수메르인들은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수백 년에 걸쳐 강물을 끌어들이는 거대한 관개수로를 건설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물이 증발하면서 흙 속에 녹아 있던 소금기가 지표면으로 올라와 하얗게 쌓이기 시작했다. 토양의 염류화(Salinization)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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