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심리학자 제임스 페니베이커는
대학생들을 작은 방에 앉히고
종이와 펜을 건넸다.
"가장 힘들었던 일을 쓰세요.
맞춤법도, 문장도 신경 쓰지 말고
십오 분, 나흘 동안만."
학생들은 처음엔 울먹이며 썼다.
그런데 몇 달 뒤 기록을 보니
글을 쓴 학생들이
보건소를 덜 찾았다.
상처는 그대로였는데
상처를 담는 방식이 달라진 것
같은 무렵 호주와 뉴질랜드의 상담실에서는
마이클 화이트와 데이비드 엡스턴이
이런 말을 조용히 건네고 있었다.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가 문제입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이렇다.
우리는 살아온 일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 기억한다.
"나는 원래 예민한 사람이야."
"나는 늘 이 모양이었어."
한 줄이 마음의 설명서가 되어
다음 날의 나를 미리 정해버린다.
문제는 설명서를 쓴 손이
대개 내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어릴 적 어른의 한마디가 쓰고
오래전 실패 하나가 쓰고
누군가의 시선이 대신 받아 적은 문장들이
어느새 "나"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래서 이야기 치료는
이렇게 묻는다.
이 이야기에서 빠진 장면은 무엇인가.
네가 버텨낸 날은 왜 한 줄도 없는가.
무너질 뻔했는데 무너지지 않은 밤,
그 밤의 너는 왜 주인공이 아닌가.
한 번도 쓰이지 않은 문장이 있다.
화가 났지만 소리치지 않았던 저녁,
두려웠지만 문을 열고 나간 아침,
괜찮지 않으면서도
끝내 밥을 차려 먹은 하루.
그것들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용기의 기록이다.
설명서를 다시 쓴다는 것은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다.
있었던 일은 그대로 두고
그 일을 읽는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나는 약한 사람이다"라는 문장 옆에
"그럼에도 오늘까지 왔다"는 문장을
나란히 적어두는 일이다.
처음엔 어색할 것이다.
남이 써준 설명서에 오래 익숙했으니.
그래도 연필을 쥔 손은
이미 내 손이다.
지우개도, 새 페이지도
내 서랍 안에 있다.
마음은 풀리지 않는 기계가 아니라
읽히기를 기다리는 한 권의 바카라이다.
그리고 바카라의 마지막 장은
아직 펼쳐지지 않았다.
내 마음의 설명서는
내가 쓴다.
오늘 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해도 좋다.
"그래도 나는, 여기까지 왔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