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웃음인데 왜 어떤 웃음은 사람을 잇고, 어떤 웃음은 사람을 가르는가
가끔 주위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준다. 그런데 다 그려 보여주면, 어색한 웃음 뒤로 마음에 들지 않는 속내가 비칠 때가 있다. 닮긴 닮았는데, 자기가 바라던 모습은 아닌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과 닮았으되, 스스로 단점이라 여기는 곳만은 슬쩍 지워진 얼굴이다.
문제는 사람을 닮게 그리려면 바로 그 얼굴의 특징을 붙잡아야 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특징이라는 것이 대개 본인에게는 감추고 싶은 단점이다. 그리는 사람이 닮음을 위해 붙잡는 자리와, 그려지는 사람이 지우고 싶은 자리가 정확히 겹치는 것이다.
초상화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마음이 어긋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닮음을 좇다 보면, 붓은 저절로 캐리커처 쪽으로 한 발씩 끌려간다. 그러다 문득, 캐리커처라는 것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돌부리에 걸린 사람은 왜 웃긴가
철학자 베르그송은 '웃음'에서 아주 소박한 장면 하나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길을 달리던 사람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웃는다. 그가 일부러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것이었다면 아무도 웃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웃는 것은 그가 원치 않게 넘어졌기 때문이다. 앞에 돌이 놓여 있었으니 걸음을 늦추거나 비켜 갔어야 했는데, 다리는 하던 대로 달리기를 멈추지 못했다.
상황이 바뀌었는데도 몸은 그대로였던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있어야 할 유연함 대신, 기계 같은 뻣뻣함이 드러난 순간이다. 베르그송은 이것을 "살아 있는 것 위에 덧씌워진 기계적인 것"이라 불렀다. 나이를 먹으며 사람은 누구나 자기 버릇, 자기 생각, 자기 틀에 갇혀 조금씩 이렇게 굳어간다. 바로 그때 웃음이 콕 찔러 준다. "너 지금 굳었어, 좀 풀어져."
웃음거리가 되기 싫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다시 유연해지려 애쓴다. 그래서 웃음이 살아 있는 슬롯는 딱딱하게 굳지 않고 계속 말랑하게 숨을 쉰다. 웃음은 우리가 기계가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참 고마운 것이다.
작은 벌치고는 너무 아픈
물론 베르그송은 그 웃음이 마냥 다정하지만은 않다는 것도 숨기지 않았다. 웃음은 굳은 사람에게 내리는 작은 벌이고, 벌이니까 조금은 아파야 한다. 그 아픔 덕분에 사람은 고쳐진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웃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나는 고개를 갸웃하게 되었다. 작은 벌이라기엔 너무 가혹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웃음을 자아내려면, 누군가의 틀어진 데를 끄집어내 과장해야 한다. 캐리커처가 하는 일과 똑같다. 평소에는 생기에 가려 보이지 않던 약점을, 웃음은 돋보기로 확대해 들춰낸다. 베르그송은 여기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인다.
살아 있는 마음은 매 순간 변하기에, 진짜로 살아 있는 얼굴은 결코 똑같은 표정으로 굳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의 얼굴을 한 장의 캐리커처로 붙잡을 수 있다는 것은, 거꾸로 그 얼굴 안에 늘 똑같이 반복되는 굳은 구석이 있다는 뜻이다. 캐리커처 화가는 바로 그 굳은 구석을 찾아내 확대한다.
그리고 웃는 순간 우리 마음속에서는 감정이 잠시 꺼진다. 상대도 아픈 사람이라는 감각을 잠깐 끄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 편히 웃을 수 있다. 그 가혹함은 웃는 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베르그송은 줄곧 웃는 쪽에 서서 웃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초상화를 그려온 나는 늘 반대편, 그림을 받아 든 사람의 얼굴을 마주해 왔다.
그 순간 비치던 어색한 웃음. 그 얼굴은 고쳐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조금 다쳤을 뿐이다. 넓은 얼굴이나 처진 입꼬리는 고칠 수 있는 버릇이 아니라, 그 사람이 평생 지고 갈 생김새다. 고칠 수 없는 것을 들춰내는 웃음은 교정이 아니라 상처다. 웃는 쪽에서는 약이었던 것이, 웃음거리가 된 쪽에서는 독이 된다.
울타리 안에서만 통하는 '보편'
웃음은 또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혼자서는 잘 웃지 않는다는 것이다. 극장이 꽉 찰수록 웃음소리가 커지듯, 웃음은 같이 웃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풀어 오른다. 베르그송은 이것을 일종의 공범의식이라 불렀다. 그런데 '같이 웃는 우리'가 생기는 순간, 그 웃음 바깥에는 '웃음거리가 된 저 사람'이 함께 생겨난다. 웃음은 안쪽 사람들을 묶어주는 그만큼, 바깥의 한 사람을 밀어낸다.
베르그송은 웃음이 감정이 아니라 지성에서 나온다고 했다. 가슴으로 공감할 때가 아니라, 감정을 끄고 차갑게 바라볼 때 웃음이 터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차가운 시선을 '누구에게나 통하는 보편적인 것'이라 여겼다. 감정은 사람마다 제각각이지만, 거리를 둔 관찰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작동하기에 다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여기에 베르그송의 가장 큰 허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보편'은 사실 반쪽짜리다. 같은 장면을 보고 다 함께 웃으려면, 먼저 '우리'라는 울타리가 그어져 있어야 한다. 그 울타리 안에서만 그 시선은 보편이다. 울타리 밖으로 한 발만 나가면, 똑같은 웃음이 그곳에서는 웃음이 아니라 조롱이 된다.
안에서는 유쾌한 농담인 것이, 밖에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겨눈 칼이 되는 것이다.
하나의 웃음이 이렇게 두 얼굴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그것이 보편이 아니라 편 가르기라는 증거다. 그러니 웃음의 지성은 '모두의 보편'이 아니라 '우리 편의 보편'일 뿐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조롱은 더욱 완강하다. 그것은 "이게 안 웃기냐"고 되묻는다. 자기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보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보편은 울타리가 만들어낸 착시일 뿐이다. 웃음이 보편을 가장할수록, 그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의 소외는 더욱 깊어진다.
화면 속 조리돌림
나는 요즘, 이 백 년 전 철학자의 이야기가 조금 무섭게 들린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라. 베르그송이 본 것은 극장에서 함께 웃는 몇백 명이었지만, 지금 우리는 화면 앞에서 수십만 명이 한 사람을 겨냥해 동시에 비웃는 광경을 매일 본다.
누군가의 약점을 캐리커처처럼 극대화하고, 감정을 꺼둔 채, 같은 편끼리 낄낄거리며 결속을 다진다. 좌든 우든, 어느 진영의 방송을 켜도 풍경은 비슷하다. 상대의 틀어진 데를 물어뜯어 조롱하고, 그 조롱에 함께 웃으며 "우리는 한편"임을 확인한다.
여기서 베르그송이 말한 웃음의 좋은 기능은 사라지고 없다. 굳은 사람을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진영의 생각을 더 단단하게 굳힌다. 웃음이 유연함을 주는 게 아니라, 편 가르기를 더 뻣뻣하게 만드는 데 쓰인다. 교정이 아니라 조리돌림이고, 숨 쉬게 하는 게 아니라 숨통을 조이는 웃음이다.
베르그송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그는 '슬롯'를 대체로 옳은 것이라 믿었기에, 웃음이 누군가를 몰아낼 때 그것을 건강한 교정이라 보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슬롯'가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 서로가 서로를 '교정'한답시고 조롱하는 시대를 산다. 누가 정상이고 누구를 바로잡을 것인가. 그 기준부터가 이미 패싸움인 것이다.
캐리커처 말고, 초상화를
같은 웃음인데 왜 어떤 웃음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어떤 웃음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걸까. 아마도 그 차이는 웃음이 무엇을 겨누느냐에 있을 것이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사람은 다음부터 발밑을 살피면 된다. 고칠 수 있는 것을 겨눈 웃음은 아프더라도, 다시 일어설 자리를 남겨둔다.
그러나 고칠 수 없는 얼굴과 존재 자체를 겨눌 때, 웃음은 사람을 끌어내린다. 웃음 자체가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으로 사람을 들어 올리느냐, 끌어내리느냐가 다를 뿐이다. 그러니 나는 내 붓을 다시 생각한다. 같은 얼굴에서 굳은 것을 들춰내면 캐리커처가 되고, 살아 있는 것을 붙잡으면 초상화가 된다. 웃음도 그렇다.
우리는 지금, 서로의 캐리커처를 그리며 낄낄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번쯤은, 서로의 가장 살아 있는 얼굴을 알아봐 주는 웃음이 그리운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