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중2와 스파링할 뻔했던 날

by보건교사 옥쌤


빰~ 빰빰빰~ 빠바바바밤~~ 손에 핸드랩을 감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꼭 흥얼거렸던 록키의 멜로디. 이 음악은 반드시 마음속으로만 흥얼거려야 했다. 소리 내어 흥얼거리는 순간 체육관에서 줄넘기를 쌩쌩 돌리는 학생과 글러브 끼고 킹콩 흉내 내는 꼬마가 나를 돌아보며 까르르 웃을지도 몰랐다.


실전 스파링 경험은 전혀 없었다. 코치님이 대주는 미트나 묵직한 샌드백을 좀 두들겼을 뿐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링 위의 주인공이었다.


“저 사람도 있잖아요. 저 사람이랑 하면 안 돼요?”


소녀의 손가락이 핸드랩을 감으며 스스로에게 흠뻑 취해 있던 나를 향했다. 꿈틀거리던 근육들이 순식간에 오므라들었다.


이 시간이면 꼭 마주치곤 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인사를 나눈 적 없었다. 나의 존재를 의식하고는 있었구나.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나였을까?


중학교 2학년쯤 됐으려나? 키는 아직 다 자라지 않았지만 강단 있는 눈빛을 지녔고, 늘 검은 티셔츠 차림이었다. 씩씩거리며 샌드백을 마구 후려치고는 휘몰아치는 호르몬을 사방에 쏟아붓곤 했다.


무더운 한여름 어느 날에는 하얀 글씨로 ‘체중 감량’이 적힌 까만 긴팔 후드를 뒤집어쓰고 인상을 쓴 채 러닝머신을 치타처럼 달리고 있었다. 대놓고 보지는 못하고 힐끗거리니 관장님이 미소를 지으며 대회 준비 중이라 체중을 줄인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 소녀가 코치님을 붙잡고 체육관에 여학생이 없어 스파링을 못 한다는 게 말이 되냐며 악을 쓰는 중이었다. 그러다 급기야 구석에 있던 나를 지목한 것이다.


코치님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안 돼.”


소녀는 들끓는 호르몬을 잔뜩 목소리에 담아 물었다.


“왜 안 돼요? 쟤네는 남자애들이라 못 하고! 저 사람은 왜 안 되냐고요! 여자잖아요!"


'너랑 하기엔 네가 너무 무서워.....'

대놓고 말은 하지 못하겠고 샌드백을 퍽퍽 쳐대며 그들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혹시나 소환되는 거 아니겠지?'


코치님은 소녀를 달래고 어르면서도 절대 소녀와 나를 링으로 올리지 않았다. 복싱을 배워는 봤는데 단 한 번도 스파링은 해보지도 못했기에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키도 나보다 10cm 정도는 작은 것 같고 나이는 20살쯤 어려 보이는 소녀를 첫 스파링 상대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들끓는 호르몬에 반쯤 분노와 화에 허덕이는 소녀라니. 북한도 무서워서 못 쳐들어오는 중2와 첫 스파링은 피해야만 했다.


그날의 나는 무사히 스파링을 피할 수 있었고, 또 같은 사태를 마주칠까 봐 겁이 나 다른 시간대를 모색해 보았지만 어쨌든 가던 시간이 익숙해 원래 나가던 시간대로 계속 운동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여학생은 그 이후로 날 아는 체도 안 했다.


그대로 상대를 찾지 못해 2년이나 복싱장을 다녔는데, 스파링을 한 번도 못 했다.


학교에서 일하다 보니 4시에 퇴근했고,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복싱장에 가면 오후 5시였다. 그 시간에 가면 대부분 초등학생, 중학생이었다.


관장님은 절대 나의 스파링 상대로 학생들을 지목하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코치님이 가끔씩 스파링 시늉을 해줬을 뿐, 나와 체격이 비슷한 성인 여성은 나타나질 않았다.


언젠가는 체격과 실력이 비슷한 스파링 상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복싱장을 드나들었다. 결국 운명적인 스파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의 몸에 아이가 자리 잡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 임신을 확인한 후 원래 하던 운동은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의사는 단호하게 격한 운동을 금지했다.


복싱 체험은 단 한 번의 스파링 없이 끝이 났다. 누가 나에게 복싱을 해본 적이 있냐고 묻는다면 배운 적이 있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육아에 찌든 지금도 가끔씩 글러브 낀 손에서 나던 팡팡 소리가 떠오른다. 코치님의 미트를 원투 호령에 맞춰 두들길 때마다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물론 스파링을 치렀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모두가 험한 운동이라고 놀랐던 복싱은 나에게 무해했고 험하지 않았다. 글러브에 전혀 맞아본 적 없는 내 볼때기와 배는 철없이 복싱을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