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쉬운 혁신은 연구소에 없다
경쟁사가 신제품을 출시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사장님은 그날 밤 잠을 설친다. "우리도 신제품으로 승부해야 하나." 다음 날 개발 견적을 받아 든다. 억 단위의 숫자와 1년이 넘는 개발 기간. 그런데 막상 그려보면 경쟁사와의 차별점은 떠오르지 않고, 매출은 당장 다음 달이 급하다. 한숨이 나온다. 그런데 정말, 당신에게 부족한 것이 신제품일까.
숫자를 하나 보자. 한 조사에 의하면 정부 R&D 예산을 지원받은 중소기업의 기술개발 성공률은 90.7%다. 그런데 사업화 성공률은 50.5%에 그친다고 한다. 열에 아홉이 기술개발에 성공하는데, 사업은 절반만 성공한다. 실험실과 시장 사이에서 사라진 40%는 어디로 갔는가. 기술이 없어서 무너진 것이 아니다. 기술을 돈으로 바꾸는 설계도가 없어서 무너진 것이다.
그 설계도의 이름이 비즈니스 모델이다.
혁신은 발명이 아니라 조합이다. 비즈니스 모델은 고객에게 가치를 전달하고 그 대가로 돈을 버는 사업의 전체 설계도이다. 이 설계도는 세 개의 질문으로 압축된다. 무엇을 줄 것인가.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어떻게 받을 것인가. 혁신은 이 셋 중 하나의 답만 바꿔도 일어난다.
화가들은 원래 후견인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렸다. 귀족이 원하는 그림을, 귀족이 정한 값에 그렸다. 그러다 누군가 순서를 뒤집었다. 먼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린 뒤, 전시장을 열어 관심 있는 사람에게 팔았다. 개인전 모델의 탄생이다. 그림은 그대로였다. 바뀐 것은 파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 변화가 화가에게는 창작의 자유를, 애호가에게는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유럽의 한 대학 연구팀이 수백 개의 비즈니스 모델 혁신 기업을 분석했다. 결론은 명쾌했다. 성공한 혁신의 약 90%는 이미 존재하던 아이디어와 개념의 재조합이었다. 혁신은 발명이 아니라 조합이다. 조합에는 연구소도, 억 단위의 개발비도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관점이다. 그래서 필자는 단언한다. 비즈니스 모델 혁신이야말로 가장 쉬운 혁신이다.
물론 돈으로 하는 혁신도 있다. 대기업과 투자사들은 전후방 통합으로 규모의 경제와 시너지를 만든다. 훌륭한 길이지만 그것은 자본의 길이다. 이 글은 그 길을 걸을 수 없는 나머지 99%를 위한 글이다. 중소기업에게는 세 갈래의 다른 길이 있다.
제1의 길, 고객과 니즈를 다시 정의하라
첫 번째 길에는 세 개의 레버가 있다. 첫째, 고객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필자가 재직하던 회사가 매출 30억 원의 환경기자재 업체를 인수했고, 필자는 인수 후 통합과정(PMI)을 직접 맡았다. 이 회사의 고객은 정부였다. 환경 분야 공공입찰 시장은 정체됐고, 경쟁 격화로 입찰 단가는 해마다 내려갔다. 우리는 제품을 바꾸지 않았다. 고객을 바꿨다. 성장하는 반도체 산업의 환경 유틸리티 EPC라는 민간 B2B 시장으로 건너간 것이다. 내부의 우려가 컸다. "그쪽은 룰이 완전히 다른데, 과연 될까요."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작은 프로젝트부터 하나씩 실적을 쌓으며 자원을 집중했다.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지만, 이 과감한 혁신이 급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민간에서 검증된 역량은 해외 플랜트 시장으로 가는 다리가 됐고, 기계업체는 엔지니어링 업체를 거쳐 글로벌 환경솔루션 전문기업이 되었다. 매출은 800억 원, 20배가 넘게 성장했다.
둘째, 같은 고객의 채워지지 않은 니즈를 정조준하는 것이다. 고객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 한 라면회사는 라면 시장의 대다수가 아니라, 극강의 매운맛을 갈망하는 극소수 마니아를 정조준한 제품을 내놓았다. 시장조사로는 "너무 맵다"는 답이 압도적이었을 제품이다. 그러나 0.1%의 강렬한 니즈는 SNS의 도전 문화를 타고 번졌고, 그 제품은 글로벌 수출 신화가 됐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제품은 아무도 열광시키지 못한다. 미충족 니즈(Unmet Needs)는 언제나 소수의 목소리 속에 숨어 있다.
셋째, 같은 고객의 같은 니즈를 채우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지난 화의 수건 회사가 바로 이 경우다. 고객도 미용실 그대로, 니즈도 깨끗한 수건 그대로였다. 바뀐 것은 방식이었다. 낱장으로 파는 대신 세탁과 수거까지 바카라임지는 관리 서비스로 전환하자, 평범한 납품업체가 대체 불가능한 파트너가 됐다. 그리고 이 세 번째 레버는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면, 어떤 방식에 집중할 것인가.
제2의 길, 한 우물의 프로세스를 파라
커피숍을 보자. 오늘날 성공한 카페들은 커피맛으로만 승부하지 않는다. 커피맛은 기본기일 뿐이고, 승부는 공간에서 난다. 이 길을 연 것은 커피가 아니라 '집과 회사 사이의 제3의 공간'을 팔겠다고 선언한 글로벌 커피 체인이었다. 그 후 동네의 작은 카페들도 배웠다. 노트북을 펼치기 좋은 카페, 대화가 잘 들리는 조용한 카페, 사진이 잘 나오는 카페. 같은 원두를 쓰고도 어떤 프로세스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가게가 된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컨설팅을 진행해 보면, 어려움을 겪는 회사의 공통점이 보인다. 모든 것을 조금씩 골고루 잘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어느 하나도 최고가 못 된다. 그럴 때 필자의 조언은 항상 같다. "당신의 비즈니스 모델은 무엇입니까. 중소기업도 있고 대기업도 있는데, 당신은 어떤 운영에 집중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까."
전 과목 평균 70점을 맞는 것보다, 나머지 과목은 60점을 맞더라도 국영수에서 90점을 맞는 것이 훨씬 더 성공에 가까운 길이다. 배송, AS, 설치, 포장, 응대. 고객이 가장 아파하는 프로세스 하나를 찾아 그곳에 자원을 쏟아부어라. 정수기를 파는 것이 아니라 정기 방문관리를 파는 것으로 업을 규정한 회사가 있고, 가구가 아니라 당일 설치를 파는 회사가 있다. 운영 탁월성이 쌓이면 시장은 그 회사를 한 문장으로 기억한다. "OO 하나는 그 집이 제일 잘하지." 그 한 문장이 브랜드다.
제3의 길, 받는 방법을 바꿔라
마지막 길은 가격, 즉 대가를 받는 방식의 설계다. 여기에는 두 마리 토끼가 있다. 평균 판매가격을 올리는 것과 구매 전환율을 올리는 것이다. 보통은 하나를 잡으면 하나를 놓친다고 생각하지만, 설계를 잘하면 둘 다 잡는다.
평균 판매가격을 올리는 열쇠는 기준점이다. 사람은 가격을 절댓값이 아니라 비교값으로 판단한다. 카페 메뉴판에 스몰, 미디엄, 라지 세 가지 사이즈가 있으면 대다수는 미디엄을 고른다. 라지라는 기준점이 미디엄을 합리적 선택으로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상품을 상·중·하 세 단으로 설계하고 최상급 상품을 기준점으로 세워라. 최상급이 많이 팔리지 않아도 좋다. 그것의 존재만으로 중간 상품의 판매 단가가 올라간다.
전환율을 올리는 열쇠는 문턱이다. 목돈이 부담스러운 고객에게는 월 단위의 가벼운 결정을 제안하라. 구독과 할부가 바로 그 도구다. 재고를 걱정하던 반찬가게가 월간 구독으로 전환하자 고객의 첫 구매 문턱은 낮아졌고, 회사의 현금흐름은 안정됐다.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시작한 이 방식은 이제 렌털을 거쳐 꽃, 세탁, 전통주, 동네 가게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매달 만나는 고객에게는 업셀링과 크로스셀링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원리는 단순하다. 비싸다면 나눠 받고, 싸다면 묶어 받아라. 기준점을 세워 단가를 올리고, 문턱을 낮춰 전환율을 올려라.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세 갈래 길에 정답은 없다. 자신을 돌아보고, 경쟁자를 돌아보고, 고객을 돌아보라. 셋 중 어떤 길이 우리에게 독창성을 가져다줄지 선택하고, 그곳에 자원을 집중해 실행하는 것은 오롯이 경영자인 당신의 몫이다.
기억하라. 남들과 같은 것을 팔아도 된다. 그러나 운영은 남들과 다르게 설계해야 한다. 제품은 베낄 수 있어도 그 설계능력은 베끼기 어렵다. 설계도는 종이 위에 있지만, 설계능력은 조직 안에 쌓이기 때문이다. 그 능력이 단단해질 때, 당신의 사업은 비로소 구조의 힘으로 굴러가는 기업이 된다.
[자가진단 세 가지 시선]
투자자의 시선
1. 이 회사의 매출은 제품의 힘으로 만들어지는가, 구조의 힘으로 만들어지는가?
2. 지난 3년간 이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에서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3. 이 회사를 지금 매물로 내놓는다면, 인수자는 이 회사의 제품을 사겠는가, 비즈니스 모델을 사겠는가?
CEO의 시선
1. 우리의 고객 정의는 3년 전과 같은가? 시장이 정체됐다면, 고객을 바꾸거나 소수의 미충족 니즈(Unmet Needs)를 정조준할 용기가 있는가?
2. 우리 가격표에는 기준점이 있는가, 아니면 원가에 마진만 얹은 숫자가 있는가?
3. 우리는 국영수 90점을 위해 무엇을 61점으로 버리기로 결정했는가? 포기한 것이 없다면, 집중한 것도 없는 것 아닌가?
팀장의 시선
1. 우리 팀의 업무 중 고객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활동은 몇 퍼센트인가?
2. "우리 회사는 OO을 잘하는 회사다"라고 할 때, OO을 한 단어로 말할 수 있는가?
3. 사장이 한 달간 자리를 비워도 재구매와 추천이 저절로 굴러가는가? 아니라면 우리는 기업인가, 아직 장사인가?
[월요일 당장 실행과제]
이번 주 월요일 아침, 30분이면 시작할 수 있다.
우리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을 종이 한 장에 그려라.
1단계: 월요일 오전, 화이트보드에 세 개의 질문을 적어라. 무엇을 주는가, 어떻게 전달하는가, 어떻게 받는가. 그리고 우리 회사의 현재 답을 채워라.
2단계: 주중에 경쟁사 세 곳의 답을 같은 방식으로 채워라. 우리와 같은 칸이 몇 개인지 세어보라. 세 칸이 모두 같다면, 우리는 지금 가격으로만 싸우고 있는 것이다.
3단계: 금요일, 세 칸 중 하나를 바꾸는 가설을 정하라. 그리고 다음 달, 가장 작은 규모로 시장에서 검증하라. 고객 열 명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