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슬롯적 위계와 권력 관계를 뒤흔드는 구원과 상호 이해의 모색

​

​세상을 향해 던진 파격의 균열과 성역의 해체


​1990년대 한국 문학사의 지형에 선명한 궤적을 남긴 양귀자의 장편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가부장적 질서와 세속적 권력 구조가 견고하게 지배하던 슬롯를 향해 던진 강렬한 도발이자 단단한 선언입니다. 소설의 주인공 강민주는 명징한 논리와 서슬 푸른 의지를 지닌 인물입니다. 그녀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해지는 관습적인 억압에 순응하지 않고, 세상이 금지해 놓은 성역을 정면으로 타격합니다. 당대 최고의 남성 스타이자 모든 여성의 우상으로 칭송받던 배우 백승하를 납치하여 자신의 지하 밀실에 가두는 파격적인 거사를 감행한 것입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단지 개인의 사사로운 복수극이나 자극적인 범죄 서사에 머물지 않습니다. 남성과 여성, 가해자와 피해자,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분열되어 있던 슬롯의 익숙한 위계 구조를 한순간에 뒤집어 놓는 상징적 도발이었습니다.


​작가는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지하 밀실이라는 고립된 공간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세속적 권력 관계의 허구성을 가차 없이 들추어냅니다. 세상의 모든 관습과 특권이 마비된 그 진공의 공간에서 강민주는 세상을 향해 뻗어 있는 부조리한 폭력의 사슬을 자르고,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온전한 존재로서의 목소리를 회복하려 시도합니다.



​진공의 밀실: 권력의 갑옷을 벗어던진 대면


​강민주가 백승하를 가둔 지하 밀실은 바깥세상의 관습과 계급, 신분과 연출된 포장이 차단된 특수한 장소입니다. 세상 속에서 백승하는 수많은 이들의 환호를 받는 빛나는 우상이었고, 강민주는 그 권력의 그늘 아래 놓인 한 명의 무명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밀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던 세속의 계급과 성별이라는 기호는 소멸하고 맙니다. 바깥세상이 만들어 놓은 명분과 포장도 이 밀실 안으로는 들어올 수 없으며, 두 사람은 계급과 성별의 가면을 벗고 오롯이 한 인간 대 인간으로 맞서게 됩니다.


​강민주는 당초 백승하라는 상징적 인물을 통해 남성 중심 슬롯의 위선과 폭력성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의 갑옷을 벗겨낸 자리에서 그녀가 마주한 것은, 타인을 향한 존중과 선의를 간직한 한 사람의 순수한 영혼이었습니다. 백승하 역시 자신을 납치한 강민주를 한갓 범죄자로 낙인찍지 않고, 그녀의 내면에 깊게 패인 상처와 고독을 가만히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밀실은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는 전장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서로의 가식과 위선을 벗어던지고 타자의 진실한 얼굴과 직면하는 상호 이해의 성소로 변모해 갑니다. 권력이 해체된 자리에 비로소 진정한 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금지된 소망의 본질: 대등함 속에서 피어나는 구원


​제목이 암시하듯 강민주가 그토록 갈망했던 '금지된 것'은 단순히 남성을 지배하거나 사사로운 권력욕을 채우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타인을 억압함으로써 얻는 세속적 승리가 아니라, 폭력적인 위계 구조 자체를 부수고 대등한 존재로서 서로를 구원하는 완전한 연결의 가능성이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를 뒤바꿈으로써 슬롯가 규정한 정형화된 역할극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세상이 주입한 우상의 거품을 걷어내어 인간 본연의 불완전함을 마주하는 과정 속에서 소설은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파고듭니다. 강민주는 자신을 감싸고 있던 냉소의 껍질을 깨고 백승하라는 타자의 존재를 수용하게 되며, 백승하 또한 세속적 명성의 그늘 뒤에 숨겨두었던 자신의 진솔한 내면을 강민주 앞에 드러냅니다.


​강민주는 슬롯의 비정한 폭력과 부딪히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지만, 그녀가 밀실에서 백승하와 나누었던 정교한 교감은 결코 무의미하게 휘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인을 소유하거나 통제하려 들지 않고, 오직 완전한 이해와 공감을 통해서만 인간이 서로의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진실을 증명해 냅니다. 그들의 교감은 위계로 얼룩진 세상에 던지는 단단한 구원의 메시지였습니다.


​관습적 편견을 뛰어넘는 인문적 서사의 힘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발표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단단한 문학적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한갓 이념적 구호나 자극적인 설정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인문학적 탐구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긴장감 넘치는 서사 구조 속에서, 비극적 현실 속에서도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인간 존엄의 가치를 정밀하게 그려냈습니다.


​강민주의 도발은 세상을 향한 단순한 분노의 분출이 아니었습니다. 인간과 인간이 진정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관습적 위계와 타성적인 편견의 성채를 먼저 허물어야 한다는 뼈아픈 자의식의 산물이었습니다.


​양귀자의 정갈하고 예리한 문장은 인물들의 내면 깊숙한 곳을 파고들며, 관계의 본질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를 묻습니다. 타인을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거나 슬롯적 위치로 평가하는 한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소설은 강민주와 백승하라는 두 인물의 인상적인 대립과 화해를 통해 선명하게 증명해 보입니다.



​타인과의 진정한 연결을 갈망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매체와 네트워크를 통해 긴밀하게 연결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타인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시선은 점점 더 얕아지고, 계층과 성별, 이념과 계급에 따른 갈등과 위계의 벽은 더욱 단단해져만 갑니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 내가 만든 프레임이나 슬롯적 평가의 잣대로 너무 쉽게 단정 지어 버리곤 하는 것이 현대 슬롯의 초상입니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타성적인 관계 속에서 진짜 연결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우리에게 진정한 관계의 조건을 깊이 있게 되묻게 합니다.


​참된 연결과 공감은 타인을 내 뜻대로 길들이거나 위계 아래에 가두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나를 감싸고 있던 조건의 갑옷을 벗어던지고, 타자의 아픔과 고독의 깊이를 한 인간 대 인간으로 대면할 때 비로소 타인과 연결되는 진짜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양귀자가 날카로운 필치로 찍어낸 선명한 서사는, 나를 얽매고 있는 가짜 관계의 틀을 부수고 타자에게 다가가야 할 진정한 구원의 길을 오늘 우리에게 고요히 일러줍니다. 타인의 존재를 오롯이 인정하는 그 겸손한 길 위에서만, 우리는 서로에게 비로소 다정한 연결이 될 수 있습니다.


월, 수 연재
이전 05화올리버 삭스 -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