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렌 블릭센 — 『아웃 오브 아프리카』

낯선 대지와 자연 속에서 상실을 경험하며 새로 쓰는 정체성의 서사


익숙한 세계를 떠나 낯선 원초의 대지로


​인간은 흔히 안온한 집과 친숙한 제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삶의 거대한 전환점은 때로 스스로를 낯선 이방인의 자리에 올려놓을 때 찾아옵니다. 덴마크의 귀족 출신 작가 카렌 블릭센(Karen Blixen)의 자전적 소설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문명 세계의 온실을 벗어나 아프리카 케냐의 광활한 사바나 대지로 걸어 들어간 한 여성의 묵직한 기록입니다.


​1914년부터 1931년까지, 17년에 걸친 아프리카에서의 삶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낭만이 아니라 묵직한 생존의 현장이었습니다. 사업의 실패, 남편과의 이혼, 커피 농장의 파산, 그리고 영혼의 동반자였던 데니스 핀치 해튼(Denys Finch Hatton)의 비극적인 죽음에 이르기까지, 소설은 삶이 인간에게 안길 수 있는 온갖 상실의 연속을 담아냅니다. 그러나 카렌 블릭센은 이 지독한 상실 앞에서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프리카라는 야생의 대지 위에서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자아'를 빚어냅니다.


소유가 아닌 '공존'으로 바라보는 자연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던지는 핵심적인 통찰은 문명인이 자연과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입니다. 카렌 블릭센은 커피 농장을 경영하는 지주였지만, 아프리카의 대지와 원주민 키쿠유족(Kikuyu)을 결코 지배하거나 소유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아프리카의 밤하늘을 소유할 수 없다. 그 광활한 정적과 사자의 포효, 바람의 숨결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온몸으로 마주하고 경탄해야 할 대지의 질서다."


​작가는 바람과 비, 야생동물의 이동, 그리고 원주민들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수용합니다. 사자를 사냥할 때조차 그것은 인간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행위가 아니라, 대지의 야성에 대한 깊은 존경과 맞대결의 형식을 띱니다.


​이러한 태도는 유럽적 질서와 계급에 매여 있던 그녀의 관성을 깨뜨립니다. 카만테, 키누안주이 등 원주민들과의 깊은 유대와 교감은, 문명이라는 정교한 가공품 뒤에 숨어 있던 인간 본연의 순수함과 자존감을 일깨웁니다. 타인을 내 기준에 맞춰 바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의 협소한 한계를 깨고 확장된 자아를 마주하게 됩니다.



상실의 폐허 위에서 새로 쓰는 정체성


​아프리카에서의 삶이 종장에 다다랐을 때, 카렌 블릭센의 손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뭄과 화재로 커피 농장은 파산했고, 사랑했던 이는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으며, 결국 그녀는 아프리카를 떠나 고향 덴마크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상실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작가 '아이작 다이네센(Isak Dinesen)'이라는 고유한 문학적 자아를 탄생시킨 토양이 되었습니다.


​상실을 통한 본질의 발견

물질적 부와 지위, 사랑하는 이마저 모두 떠나보낸 뒤에야 비로소 그 무엇으로도 훼손될 수 없는 자기 내면의 단단한 핵을 발견합니다.


​비극을 서사로 변환하는 힘

삶이 안겨준 고통과 비극을 원망하는 대신, 이를 고요히 관조하고 문장으로 엮어냄으로써 삶의 주도권을 되찾습니다.


​거대한 우주적 질서에 대한 순응

인간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 삶의 우연성과 한계를 인정할 때 찾아오는 깊은 내면의 평화와 자유를 배우게 됩니다.


​그녀에게 아프리카는 단순히 스쳐 지나간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가두고 있던 이전의 껍질을 벗겨내고, 텅 빈 손으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서사적 자아를 다진 고결한 시련의 장소였습니다.



고립과 상실을 지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우리는 종종 삶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 자기 존재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망을 겪습니다. 온라인 게임에서의 실패, 관계의 단절, 혹은 오랫동안 신봉해 온 가치관의 균열 앞에서 마주하는 고독은 때로 아득하기만 합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인생의 거친 풍랑을 지나고 있는 우리에게 야생의 사바나가 건네는 묵직한 언어로 말을 걸어옵니다.


​"나는 지금 무언가를 잃어버린 빈자리에 주저앉아 있는가, 아니면 그 상실을 통해 비로소 드러난 내 진짜 모습과 대면하고 있는가?"


​"익숙한 안정감 뒤로 물러서지 않고, 삶이 던지는 낯선 시련과 당당히 공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폐허의 자리에서도, 우리에게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다시 써 내려갈 서사의 힘이 남아 있습니다. 카렌 블릭센이 아프리카의 붉은 대지 위에서 건져 올려 낸 지독한 품격과 자존의 문장들은, 오늘 우리의 상실 역시 새로운 정체성을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여정임을 조용히 일깨워 줍니다.



* 아이작 다이네센(Isak Dinesen)은 카렌 블릭센이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비롯한 주요 작품들을 발표할 때 사용했던 대표적인 필명(Pen name)입니다.

​이 필명에는 작가의 깊은 해학과 삶을 바라보는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이름의 기원과 의미

​'아이작(Isak)'은 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Isaac)에서 따온 이름으로, 히브리어로 "웃음" 또는 "웃는 자"라는 뜻을 가집니다.


​삶의 거친 풍랑과 지독한 상실을 겪으면서도 결코 비장함에 눌리지 않고, 비극마저 관조적이고 의연한 '웃음(해학)'으로 승화시키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담긴 필명입니다.


​남성 필명을 선택한 시대적 배경

​1930년대 당시는 여성이 쓴 문학작품, 특히 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이나 서사시적 작품에 대해 문단과 대중이 선입견을 가지기 쉬웠던 시대였습니다.


​블릭센은 자신의 글이 성별이라는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오롯이 문장과 서사의 힘만으로 평가받기를 원했기에 남성적 느낌을 주는 필명을 선택했습니다.


​작품 발표의 역사

​1937년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미국과 영국에서 처음 출판되었을 때도 '아이작 다이네센'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영미권에서는 지금도 '카렌 블릭센'이라는 본명보다 '아이작 다이네센'이라는 필명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으며,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를 때도 이 필명이 거론되곤 했습니다.


​정리하자면, 카렌 블릭센이 아프리카의 삶과 상실을 문장의 예술로 탈바꿈시키며 세상에 자신을 내보인 문학적 자아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아이작 다이네센'입니다.



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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