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가을은 충분했다

북한산 백운대 길에서 만난 아이들의 말, 그리고 우리 부부만의 걸음

by김남정


10월 11일 북한산 백운대 방향으로 가을 산행을 했다. 붉게 물든 단풍 사이로 펼쳐진 파란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맑았고, 햇살을 머금은 잎들은 저마다 다른 빛깔로 빛났다. 그 풍경을 바라보다 알베르 카뮈의 희곡 <오해>에 나오는 가을에 관한 문장이 떠올랐다. 가을을 두 번째 봄에 비유하며 모든 잎이 꽃과 같다고 말하는 대사다.

image.png▲북한산 가을빛안내판 너머로 북한산의 봉우리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푸른 하늘과 울창한 숲 사이로 물들어가는 가을빛이 산행의 설렘을 더합니다.

봄에는 피어나는 꽃이 아름답고, 가을에는 저마다의 빛깔로 물드는 잎이 아름답다. 한 계절을 살아낸 잎들이 마지막까지 자신만의 색을 내는 모습이 오래 눈에 남았다.



우리는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해 백운대 방향으로 걸었다. 산길은 점차 가팔라졌고, 곳곳에 돌길과 바위 구간이 이어졌다. 발밑을 살피며 한 걸음씩 오르다 보니 산행에는 체력뿐 아니라 주의도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단풍철의 북한산은 거대한 바위와 붉고 노란 나뭇잎이 어우러져 화려했다. 하지만 그날 우리를 오래 붙잡은 것은 풍경만은 아니었다.



"낙석주의가 무슨 뜻이야?"



호흡을 조절하며 백운대를 향해 오르던 길,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산을 오르고 있었다. 작은 몸으로 돌길을 씩씩하게 올라가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이어졌다. 그러다 한 아이가 길가의 안내문을 보고 물었다.


image.png▲북한산에서 만난 가을의 풍경과 아이들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마주한 아이들의 모습이 산행에 소소한 정겨움을 더합니다.



"얘들아, 낙석주의가 무슨 뜻이야?

잠시 뒤 다른 아이가 대답했다.



"떨어질 낙, 돌 석이잖아. 그러니까 돌이 떨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이지!"



어른에게는 익숙한 안내문이 아이들에게는 궁금한 질문이 되고, 그 질문은 또래의 설명을 거쳐 이해로 이어졌다. 낱말의 뜻을 알아가는 동시에 산길에서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도 배우는 순간이었다.



뒤따르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발밑을 살피라고 일렀다. 위험한 곳에서는 걸음을 늦추게 하고, 무리하지 않도록 살폈다. 그 모습을 보며 아이를 키운다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부모는 아이가 세상을 두려워하기만 하도록 가르칠 수 없다. 그렇다고 위험을 모른 채 나아가게 할 수도 없다. 위험을 알아차리는 눈을 길러주고 스스로 판단하도록 돕는 것, 아이가 자기 힘으로 나아가도록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부모의 중요한 역할일 것이다.



언젠가 아이들은 부모보다 앞서 걸어갈 것이다. 그때 부모가 곁에 없더라도 '낙석주의'라는 글자를 보고 잠시 멈춰 주변을 살필 수 있다면, 오늘의 산행은 충분한 배움이었을 것이다.


산을 오르는 사람, 저마다 다른 목적지



연휴 마지막 날인 일요일, 등산객이 많지 않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북한산에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혼자 묵묵히 걷는 사람, 친구와 웃으며 오르는 사람, 아이 곁에서 걸음을 살피는 부모,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연인들. 외국인 탐방객들도 눈에 띄었다.



사람마다 산을 찾는 이유는 다를 것이다. 건강을 위해 걷는 사람도, 일상의 답답함을 털어내려는 사람도, 단풍을 가까이에서 즐기려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정상에 오르는 데 의미를 두고, 누군가는 산길을 걷는 시간 자체를 즐긴다. 같은 길을 걷더라도 저마다 마음에 품은 목적지는 다르다.



정상을 향하는 대신 산허리를 걷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돌길을 오르다 갈림길에 이르렀다. 표지판에는 백운대 정상까지 0.4km라고 적혀 있었다. 정상까지는 조금만 더 오르면 되는 거리였지만, 우리는 그날 꼭 정상에 서야 한다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대신 북한산 대피소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 쪽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image.png▲이정표를 따라 만난 북한산의 가을갈림길의 이정표가 다음 여정을 알려 주고, 나무 계단은 단풍 물든 숲 사이로 이어집니다


남편이 물었다.



"오늘은 정상까지 가지 않고 이 길로 걸어도 괜찮겠지?"



"그럼. 오늘은 가을을 천천히 보고 가자."



정상에 오르지 않는 것은 포기가 아니었다. 그날의 산행을 우리에게 맞게 선택하는 일이었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을 벗어나 북한산 대피소 방향으로 걷자 북한산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거대한 암벽은 하늘을 향해 솟았고, 노랗고 붉은 잎들은 회색 바위와 어우러졌다. 나무 계단이 이어지는 길에서는 발걸음이 자연스레 느려졌다. 햇빛을 받은 잎들이 빛났고, 발밑에서는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숲의 그늘에 들어서면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땀을 식혀주었다.



단풍나무 아래에서 간식을 꺼내 쉬는데 벌들이 주변을 오갔다. 청설모는 낙엽을 헤치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화려한 단풍에 눈길을 빼앗긴 사이, 숲의 생명들은 저마다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무에 매달린 잎과 땅에 내려앉은 잎은 서로 다른 자리에 있었지만 어느 쪽도 덜 아름답지 않았다. 사람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한창 뻗어 올라가는 시절이 있는가 하면, 속도를 늦추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시절도 있다. 무엇을 더 이루었는지 만으로 한 사람의 시간을 판단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걸음이 있다



정상에 올랐더라면 또 다른 풍경을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지 않았기에 만난 풍경도 있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하루의 모습은 달라지지만, 한 가지 길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산행을 마치고 돌아보니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없었다. 남편과 나란히 걷고, 풍경 앞에서 멈추고, 바람 소리를 들었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충분히 충만한 시간이었다.



카뮈의 문장처럼 가을 나뭇잎들은 꽃처럼 빛났다. 마른 잎들이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해서 그 잎이 지나온 계절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저마다의 빛깔을 남긴 채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그날의 산행은 우리 부부에게 그런 하루였다. 정상을 향한 욕심을 내려놓으니 길이 보였고, 속도를 늦추니 가을 산의 풍경이 더 깊이 다가왔다. 같은 길을 함께 걸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도 고마웠다. 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가을은 충분했다. 때로는 목적지에 닿는 것보다 지금 걷는 길을 온전히 느끼는 일이 더 깊은 산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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