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 한 포기

by최명숙


텃밭에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 밭이랑 맨 뒷줄 왼쪽 자리에서 실하게 자라던 배추 한 포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가슴에 찬바람이 휭 지나갔다. 텃밭에 갈 때마다 튼실하게 자라는 걸 보고 얼마나 함함해했는데. 모르는 사람은 그깟 배추 한 포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니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어이없는 마음을 달래고 있을 때, 노랑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날아와 배추밭에 앉았다. 나비는 알고 있을까, 내 배추 뽑아간 사람을.


여름 장마 끝에 텃밭을 정리했다. 상추와 깻잎 등 남은 작물과 웃자란 풀을 모두 뽑느라 손이 엉망이 되었지만 김장거리 심을 생각에 약간 설레었다. 다 뽑아낸 밭에 거름 뿌리고 삽으로 땅을 뒤집는 일은 중노동이었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몇 번이나 쉬면서 땅을 뒤집어 거름이 속으로 들어가게 한 후 고르게 폈다. 그래야 배추와 무가 잘 자랄 테니까.


밭 뒤집기 한 다음, 두 이랑엔 무씨를 뿌렸고, 나머지 이랑에는 배추 모종 30포기를 심었다. 밭 가장자리에는 쪽파까지. 하루나 이틀에 한 번씩 들러 물 주고 상태를 살폈지만, 벌레가 생겨 친환경 약치고 벌레를 잡았다. 미안해, 내가 먹어야 하니까 어째. 듣든지 말든지 내 속 편 하려고 벌레에게 말했다. 그래도 며칠 후 가보면 벌레가 들끓어 얼마나 애태웠는지 모른다. 농사가 쉽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다시금 인정했다.


애면글면 키우는 건 농사나 자식이나 마찬가지다. 비가 많이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 날이 너무 뜨거워도 걱정, 온통 걱정이다. 그런 날들을 보내고 가을이 되면서 배추와 무 쪽파가 제법 잘 자랐다. 배추는 속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무는 통통해졌다. 추석에는 무를 솎아 열무김치 해서 맛있게 먹었다. 이 맛에 농사짓는 것 같아 진정한 농사꾼이 된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배추 중에 유난히 크고 탐스럽게 자라는 포기가 하나 있었다. 배추밭의 군계일학이었다. 맨 뒷줄 왼쪽. 물 주거나 풀 뽑을 때, 웃거름 줄 때, 그 배추를 보면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저 배추는 네 쪽 낼 수 있을 거야. 속이 노랗게 차고 고소할 테지. 그중 한쪽은 김장할 때 수육 삶아 쌈 싸 먹어야겠어. 마음속엔 벌써 김장하는 날의 풍경이 펼쳐지곤 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배추 생각에 마음이 든든했다.


그랬던 배추 한 포기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도려 간 게 아니고 뽑아갔다. 움푹 들어간 자리가 배추 있던 곳이라는 걸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누가 그랬을까. 그렇게 탐났을까. 우리 텃밭의 군계일학이었던 배추. 아, 잘나면 저렇듯 손 탈 수 있다니 사람도 아닌 배추라 할지라도. 허탈했다. 지금까지 심고 가꾸느라 애쓴 수고가 연기처럼 사라지니 얼마나 가슴이 허허롭던지 자리에 주저앉을 것처럼 다리가 휘청댔다.


배추밭에 앉았던 노랑나비가 내 앞에서 알짱거렸다. 하도 속상해하니까 위로해 주려고 애교 부리는 것 같아 노랑나비에게 눈길을 주었다. 팔랑팔랑. 여기 앉았다 저기 앉았다 팔랑팔랑. 한 포기잖아, 남은 배추가 더 많으니까 잊어버려.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긴 십여 년 전에는 총각무를 심었는데 누가 하나도 안 남기고 몽땅 뽑아간 적도 있었다. 그날 이후 텃밭에 관심을 두지 않다가 이번에 분양받은 건데 이런 일이 또 생겼으니 옛날의 상처가 되살아나 더 속이 아팠다.


그래, 한 포기니까. 배추된장국을 끓여 먹었을까. 맛있었을까. 아, 잊자. 남이 농사지은 걸 가져가는 마음은 도대체 무슨 마음일까. 문제는 불안증이다. 그날 이후 자꾸 불안하다. 누가 또 가져가는 것 아닐까 싶어서다. 관리소에 이야기했다. cctv가 입구에만 있어 안타깝지만 찾을 수 없단다. 유의해서 보겠다고 말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관리인이라 해도 수백 명 텃밭 주인을 다 알 수 없는 일이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더니 그깟 한 포기 가지고 뭘 그러느냐, 다 뽑아가지 않는 게 다행이다,라고 했다. 그냥 웃으며 대수롭잖게 여기는 이도 있었다. 직접 경험한 게 아니다 보니 피상적이었고 전혀 공감되지 않는 말을 늘어놓아 나만 속 좁은 사람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물론 나보다 더 속상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친구와 통화하다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누구보다 공감해 주었다. 친구는 아예 차를 대놓고 다 쓸어가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것에 비하면 배추 한 포기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 끝내 궁금하다. 남의 것에 손대고 싶은 그 마음과 실천에 옮기는 그 마음이. 배추 한 포기, 덜 먹으면 된다. 밭을 삽으로 뒤집어 거름 두고 모종 심어 노심초사 돌본 마음, 수시로 물 주고 벌레 잡으며 잘 자라도록 바란 마음, 그걸 도둑맞은 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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