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털어 워홀을 왔는데 ATM이 내 돈을 먹었다

[D+8] 저주받은 캐나다 생활

by마케터 Zii

저주받은 캐나다 생활 8일 차

며칠을 약과 함께 기절했다가 깨어나니, 벌써 캐나다 도착 8일 차였다.

아니,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슬롯적 인간으로서 이렇게 살 수만은 없으니, 오늘은 꼭 도서관에라도 들르기로 했다. 도서관에서 TTC(캐나다 교통국)에서 쓸 수 있는 프레스토카드(교통카드)를 무료로 나눠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케터로서 이런 혜택 놓칠 수 없지.(그냥 사면 한화 5천 원 정도)

느긋하게 몸을 추스르고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 출입구가 역사 안쪽에 있는 바람에 주변을 한참 돌았는데, 오... 들어가기도 전에 마주쳐버린 도서관 코너의 전면 유리창을 등지고 열정적인 키스를 하는 커플, 과 그 앞을 아무렇지 않게 청소하고 계신 청소부아저씨. 캐나다 8일 차, 이것이 미국(옆나라)식 오픈 마인드군. 하고 깨닫다.


도서관에는 항상 복지프로그램이 있다

토론토는 도서관이 큰 만큼 진행되는 프로그램도 많았다.(정확히는 내가 간 도서관이 큰 편인 곳이었다.) 카드를 받고 나서 한 일은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들을 살피는 것!

그중에서도 특히 노스욕 라이브러리에서만 진행되는 보드게임이 너무 재밌어 보여서 꼭 참여해 보려고 따로 안내장도 받아왔다.

*저번 편에서 오늘 도서관에 보드게임을 하러 간다고 생각했는데, 그다음 날 9일째의 일이더라.

평일 낮 시간은 참여하지 못할 테지만 저녁이라면 얼마든지. 개인적으로는 스타트업을 위한 강연도 듣고 싶었지만 어학원 시간과 겹치는 바람에 일단 패스.

사실 도서관에는 프로그램이 많은 대신 보통 평일 오후경 진행되는 시간 관계상 온라인 게임인(그러니까 내 또래) 사람들보다는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좀 걱정이 되긴 했다.

담당자에게

"혹시 참여하는 사람들의 평균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라고 물었더니

"너무 걱정하지 마 다 비슷비슷해"라고 대답해 줬다.

한국에서 복지센터를 밥 먹듯 다닌 나로서는 솔직히 믿음이 안 갔지만... 그렇다면 그렇다고 믿을 수밖에. 게다가 어차피 나에게는 선택지가 없는 걸.

감기의 후유증으로 기침을 좀 하긴 했지만, 물병을 들고 다니며 자주 마시는 것으로 무마되는 수준이라 역시 캐나다 약이 독하군, 하는 생각을 하며 도서관 투어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일정은 은행에 가는 것이었는데,


평소에 하던 짓을 안 하면

워홀러 신분으로 개인이 하는 은행일이라는 게 별거 있을까. 현금으로 인출한 캐나다 달러를 캐나다 은행인 TD뱅크에 입금을 한다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한국 카드에서 현금으로 인출을 하고, 현금을 직접 들고 가서 은행에 입금한다는 과정이 좀 귀찮았지만 그것까진 괜찮았다. 현금인출은 어렵지 않았고 두 은행의 거리는 가까웠으니까.

문제는 인출한 돈을 들고 TD뱅크 ATM을 찾았을 때 발생했다.

한 달 생활비를 넣는 것이라 큰돈이었지만, 은행 안으로 들어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현금을 내 계좌에 넣어달라고 요청하는 시간이 좀 귀찮았다. 늦은 시간이기도 했고, 도서관과 가깝지만 어쨌든 집과는 반대 방향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더 낭비하고 싶지 않았달까. 그리고 한국인에게 ATM이란 얼마나 기꺼운 존재인가! 굳이 은행에 줄 서서 기다릴 필요가 있나. 그냥 입금뿐인데 말이다.

나는 오래된 블로거였으므로 은행 업무를 볼 때 항상 콘텐츠를 찍곤 했는데 그 와중에 또 영상을 찍을 핸드폰을 손으로 잡고 있기엔 날씨가 너무 추웠다. 이미 은행에 몇 번 왔다 갔기 때문에 에이, 오늘 하루야 뭐, 하고 간편하게 생각하기도 했고.

은행원에게 직접 가는 대신 ATM을 찾은 게 화근이었을까. 아니면 핀치까지 가기 귀찮아서 그냥 도서관에서 가까운 은행을 찾았던 게 문제였을까. 날씨가 너무 추워서 매일 찍던 콘텐츠를 건너뛴 게 죄였을까. 그날따라 육감이 삐용삐용 울렸는데 싸한 느낌 대신 추운 느낌일 거라 가볍게 생각하며 입금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모든 문제는 늘 하던 행동을 안 하면, 아니, 그런데 이게 내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


저도 별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요, 캐나다 은행 ATM이 돈을 먹을 수 있다는 건

토론토 은행은 ATM마다 사용법도 다 달라서, 어디는 1회 입금에도 한도액이 있고, 어디는 입금할 때 봉투를 쓰라고 한다. 내가 간 곳의 ATM은 봉투를 쓸 필요는 없었고, 단지 400달러(한화 약 40만 원)씩 입금 한도가 있어서 돈을 나눠 입금해야 했다.

한 달 생활비니 400달러로는 턱도 없어서 여러 번 나눠 입금해야 한다는 건 자명한 사실. 첫 번째 입금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현금을 입금하는데...


현금 400달러를 넣고 Next버튼을 눌렀는데, 네가 얼마를 넣었는지 확인하라는 화면에서 뜬 $0.00.

응?

응??

응????


오. 마이. 갓.

돈이 인식되지 않았으니까 돈을 다시 넣으라고? 그 돈 ATM 네가 먹었는데?

OK버튼을 누르지도 못하고, 그 와중에 내 카드도 ATM안에 들어있고.

천만다행으로 은행에 바로 붙어있는 기계였기 때문에 은행으로 들어가 말하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내가 들어간 사이 카드가 나와서 누군가 훔쳐가 버릴까 봐 너무 무서웠다. ATM이 가림막도 없이 오픈되어 있는 형태여서!


HELP! 외국어 실력은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빨리 는다

결국 잽싸게 안쪽으로 뛰어들어가 헬프를 외쳤다. 다행히 은행에 사람이 많지 않아 사람들의 줄 사이로 뛰어들 필요는 없었지만, 각 텔러의 자리는 가림막 없이 오픈되어 있는 바 형태였기 때문에 모든 텔러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긴 했다.

안 그래도 영어가 유창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때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무슨 초등학생처럼

"내가 ATM을 이용하고 있었는데, 그게 먹통(Blocked)이 되었어! 그리고 그 안에 내 돈과 카드가 갇혔어(Stuck in)!"

라고 외쳤다.

내가 너무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으니까 직원이 바 밖으로 나와서

"Okay 무슨 상황인지 알았고, 우리가 해결할게.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고, 일단 카드부터 돌려줄게."

하고 나를 안심시켰다.

역시 생각이란 빛만큼 빠른 건지 내 머릿속엔 두 가지가 스쳐 지나갔는데,

하나는 당연히 내 잘못이 아닌걸! 단 한 번도 ATM이 돈을 먹을 거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그것도 캐나다에 온 지 8일 만에! 였고, 두 번째는 그동안 콘텐츠를 만들겠다고 모든 장면을 영상을 찍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오늘, 왜 안 찍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정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가 그 돈을 넣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까 봐, 그리고 증명할 방법이 없을까 봐 너무 무서웠다. 내 돈!


한국인은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

두 명의 텔러가 붙어서 카드부터 돌려줄 테니 안심하라고 했지만 ATM이 두 개가 나란히 있어서인지 카드를 찾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왼쪽이냐 오른쪽이냐를 영어로 설명하는 게 그렇게 힘들 일이냐고.

우여곡절 끝에 카드를 먼저 찾았는데, 돈은 오늘 돌려줄 수 없단다.

직원분이 말하기를, 영업일 기준 5일 정도 걸릴 수 있어서 다음 주 화요일~수요일 사이에 돈이 들어올 수 있다고.

내가 돈을 입금했다는 증빙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건 우리 부서에서 알아서 하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아본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더 불안했다. ATM근처에 CCTV는 왜 안 달아 놓는 거야?

(그리고 이것과 관련한 내용을 나중에 알았는데, 그냥 전산과 들어온 현금을 사람들이 일일이 대조해서 결과를 찾아낸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계좌)만 남겨두면 확인해서 나한테 다시 돌려주는 구조. 다만 이 과정이 수동이다 보니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고.)

그래서 만약에 그때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 하니 자신이 직접 전화를 준다며 명함을 남겼다.

ATM으로 못 넣은 나머지 돈은 그 텔러를 통해 입금하고, 결과적으로 나는 오늘 잃어버린 40만 원의 불안함만 남긴 채 하루를 마무리해야 했다.


이 상태로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니, 캐나다 도착 8일째, 이 다사다난이 실화인 게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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