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rrace Martin [PEACE](EMPIRE, 2026)
테라스 마틴은 현대 흑인 음악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프로듀서이자 연주자다. 그는 재즈, 힙합, 알앤비, 훵크, 소울 등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단순한 장르 융합을 넘어서 장르의 본질을 읽고 거기에서 특징적인 언어들을 엮어 새롭게 제시하는 역할을 해왔다. 켄드릭 라마와 함께했던 [To Pimp a Butterfly]나 [DAMN.]은 물론이고 그룹 디너 파티로의 활동, 개인 앨범 [Velvet Portraits] 역시 특기할 만하다.
이번 앨범 [PEACE]는 많은 걸 덜어낸 앨범이다. 피아노 한 대로 전달할 수 있는 긴장과 해소, 리듬감과 멜로디컬한 지점을 모두 담아냈다. 첫 트랙 'Peace In'에서는 평화가 필요함을 외치는 목소리와 함께 짤막한 아카펠라가 지나간다. 두 번째 트랙 'Dry Rain'은 빗방울이 떨어지듯 한 음을 반복해 타건하고 그 주변에 멜로디가 흔적을 남긴다. 명상적이기도 하면서 침잠하는 이 곡에서 적은 음으로 깊은 배음을 만들어내는 구도자의 모습이 얼핏 보인다. 이어지는 'Please Leave'도 비슷한 패턴으로 곡이 진행된다. 특정 음들이 반복되고 그 반복을 기점으로 멜로디의 수축과 확장이 반복한다. 곡 중반부부터는 조금 더 뚜렷한 멜로디가 드러나며 곡이 서사화된다. 이런 흐름은 'Wrong Path'에도 연속된다. 소품곡처럼 짧은 곡들은 이 앨범을 하나로 묶기에 적절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Easy In Difficult Out'는 조금 더 소리 자체가 주는 긴장감에 집중한다. 저음부를 맴돌면서 천천히 올라가는 옥타브는 'Psychic Ads'로 넘어가 익살맞은 멜로디로 치환된다.
반면 'Rivington Forest'의 초반부는 종종걸음처럼 음들이 묶여 소리를 낸다. 그러다 차분히 걸어가는 멜로디가 중간중간 예측하지 못한 풍경을 만나면서 다른 멜로디로 뒤덮인다. 이쯤 되면 찰스 밍거스가 [Pithecanthropus Erectus]에서 들려준 구상 음악의 잔향이 떠오르기도 한다. 불협과 의도, 비의도성을 넘나드는 음들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Snakes, Rats, and Pigeons'는 아주 작은 하나의 타건에서 출발해 산발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다른 음과의 접촉을 만든다. 그러다 국면이 변하고 다른 음색의 멜로디가 등장한다. 'Sticks and Stones'는 피아노 위에 멜로디 라인이 깔릴 것만 같은 코드를 엮는다. 마치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곡의 스케치 같다. 'Beginnings and Ends'는 피아노의 긴 잔향을 이어가고 그 위에 새로운 음들을 쌓는다.
앨범에서 유일하게 다른 악기와 함께한 ‘Community Research’는 여유 있고 진중하다. 앞선 트랙들을 통해 피아노로 그린 청사진이 이 곡에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녹아있다. 앨범 전반적으로 각 곡의 길이가 짧지만 유기적으로 이어져서 하나의 긴 곡처럼 들린다. 그렇게 연결된 구상들이 평화라는 하나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아마 테라스 마틴 내면의 평화일 수도 있고, 그가 상상하는 바깥세상의 평화일 수도 있다. 불현듯 찾아온 이 평화의 단상들이 여전히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