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쓰라렸던 기억이지만, 몇 년이 지나서 내 예감이 맞았던.
2022년에 두 돌 된 쌍둥이 육아를 하면서 통번역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고, 둥이 육아는 어른이 두 명도 아니고 네 명이 필요하다고 하는 하드코어 한 일임에도 노쇠하신 친정 엄마에게 얼굴에 철판 깔고 부탁하고 통대를 다니고 있었죠.
엄마는 둥이를 몇 년 돌보시고는 금방 10년은 더 늙게 되셨습니다.
몸이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하셨고 도대체 이렇게까지 해서 내가 공부를 지속해야 하는가? 하는 자바카라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시어른들은 두 분 다 집에 계시는데 저희 엄마 혼자보다 두 분이 낫지 않나 하는 마음의 소리도 들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람 마음인가 봅니다.
신랑이 해외에서 계속 근무를 하고 있느라 육아, 돌봄, 가사는 아예 일절 관여를 하지 않던 상황이었으니, 더 괘씸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리 세대가 변했다 하더라도 남자는 돈만 벌어오면 할 일 다 했다는 마인드를 한국 남자들과 아들 가진 부모는 고집하시니까요.
저희 시댁도 그랬습니다. 저는 38살의 고위험 산모였고 제왕절개를 하면서 과다 출혈로 죽을 뻔하다 살았고, 수혈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아기 낳는 수술은 교통사고 당한 거랑 같은 몸 상태라는데, 그 몸으로 바로 둥이 육아를 하게 되었고, 도우미 없이 밤 수유는 오롯이 제 몫이었죠.
제대로 쉬지를 못했으니 붓기가 3년이 더 지나서야 빠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합니다.
손목도 손가락도 펜을 잡기 힘든 상태로 노트 테이킹을 해야 했고,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야 하는 일은 고역이었습니다.
동기들은 아직 젊은 친구들이니 저를 이해해 줄 리도 만무했고요.
그렇게 힘들게 통대학원을 다니다, 한참 정서적 지지와 애정을 받아야 할 나이에 둥이들에게 몸 쓸 짓을 하는 것 같아 그만두겠다는 마음을 신랑에게 전달했습니다. 또한, 내 어머니에게 왜 지지 않아도 될 삶의 짐과 고통을 안겨드려야 하냐고. 친정 엄마가 무슨 업보가 있어서 이런 짐을 짊어져야 하냐며 따져 물었죠.
엄마는 혼자 둥이 육아를 하시면서, 빨래, 청소, 둥이들 식사까지 전부 담당하고 계셨습니다.
어린이집을 보내지도 않았기 때문에 엄마의 노동 강도는 거의 노인 학대에 가까웠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젊을 때, 절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했다는 마음의 짐이 엄마 스스로 고된 노동을 바카라임지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거절하지 않으시고 모든 걸 수용해 주신 엄마는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합당한 임금이나 용돈을 드릴 수도 없었지만 엄마는 감당해 주셨고, 제가 더 이상 친정엄마에게 미안해서 못하겠다며 백기를 들었던 상황인데 신랑이 그제야 자신의 부모님께 부탁을 드리게 되었죠.
그래서 신랑이 한국에 돌아와 근무하고 있는 지역의 자택으로 시부모님이 들어가셔서 둥이를 돌보시게 되고 전 학교를 다니다 들어오는 프리랜서 일을 다 맡을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이 회사일입니다.
국내 굴지의 철도를 제작하는 회사이고 이름만 대면 다 알아주는 회사입니다.
그곳에서 6개월 장기 프로젝트에 참여할 통번역사를 구하는데, 연락을 받았지만 사실 철도 관련 설계도나 공학, 기계, 철도 부품 등을 공부해 본 적이 없는 제가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고사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에이전시에서 계속 저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제가 적임자인 것 같다면서요. 인도권인 네팔에서 체류했던 경험 덕에 발음이 익숙하다는 장점때문이었을까요.
회사 면접을 두 번이나 보았고 실기 테스트도 두 번이나 진행되었는데 결국 제가 뽑혔습니다.
그때까진, 사실 어려운 기계 공학 통역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막막했던 부분도 없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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