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게임동료와의 갈등에서 의외로 쓸모 있는 기술

16화. 공무원 표창이란 받으면 장땡

by토끼 태이린




휘이이잉.

흡사 서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모래 바람이 은근하게 부는 가운데 두 여자가 1층 직원 쉼터에 마주 보고 서 있다. 여자들의 표정은 결연하다. 두 사람이 어떤 감정에서 시작되었을지는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 순간 그 표정은 단 하나의 감정만을 나타냈다.


'너 오늘 잘 걸렸다.'


한참만의 정적을 먼저 깬 건 노괭이 쪽이었다.


"김토끼 쌤. 오늘도 왜 주간업무보고 수합 안 해요?”

“…….”


그녀의 공격은 괜한 트집으로 시작되었다.


“쌤은 행정심판 전부터 진짜 마음에 안 들었어요."

"... 왜요?"

"혼자 정의로운 척 일 벌이고 다니는 사람들 딱 질색이에요. 게다가 쌤은 오히려 다른 일은 놓치고 실수하기 일쑤였죠."


행정심판 건과 민원에 시달리느라 막내로서 해야 하는 자잘한 업무들을 종종 놓치곤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가 만렙전사도 아니고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까먹을 수도 있는데 그녀의 평가는 야박했다. 아니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기본조차 제대로 안 되어 있는 사람일지 몰랐다.


"업무적으로 실수한 부분은 죄송합니다."

"난 이번에 고충 써서 나갈 거예요. 고생한 만큼 챙겨서 나가고 싶으니까 나대지 마요."


그녀는 직설적이게도 원하는 바를 콕콕 집어 잘도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의 분노 게이지는 최고치인 것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했던 나를 건드렸으니 지렁이도 밟으면 얼마나 격렬하게 꿈틀거릴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줄 기회였다.


"전 나댄 적 없어요. 쌤이야말로 왜 사람의 호의를 그딴 식으로 받아들여요?"

"... 뭐라고요?"

"전 쌤이 남자친구가 있든 말든 상관없어요.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오늘 빼빼로는 순전히 제 호의였어요. 근데 쌤은 무슨 권리로 그걸 무시하죠?"

"먼저 무시하는 것처럼 행동..."

"제가 언제요? 전 빼빼로 드린 것밖에 없는데요?"


서서히 언성이 높아지자 흥미로운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하나 둘 은근히 모이기 시작했다. 장소 선정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그렇다면 그건 미안해요. 제가 버리거나 그러진 않았잖아요."

"그 자리에서 버리셨으면 더 큰 문제죠."

"김토끼 쌤."


그녀의 눈에서는 곧 파워 불꽃 빔이라도 쏟아져 나올 것처럼 이글거렸다. 나의 표정은 그녀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일단 내 입술 근육이 실룩실룩 욱신거렸다. 눈알이 시큰거리는 걸로 봐선 왠지 곧 눈물이 터질 것 같았는데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만큼은 울지는 않을 것이다. 우는 건, 지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동안 그녀에게 쌓아왔던 설움이 내 감정을 조금씩 파고들었다.


"우리는 표창 얘기 중이잖아요. 쌤이 준비한 빼빼로는 중요하지 않아요."

"아닌데요? 전 그 빼빼로가 중요해요. 제 아이덴티티 같은 거라고요. 선생님이야말로 남의 마음을 그렇게 함부로 할 권리 따위 없어요. 아세요?"

"........"

"정의로운 척이요? 저도 그 일 처리하면서 후회하고 힘들었어요. 그래도 제가 저지른 일이니까, 바카라임져야 하니까 최선을 다한 거예요. 저 한 번이라도 뭐 도와주신 적 있으세요?"

"......"


아뿔싸. 드디어 왼쪽 눈은 결국 안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 한 방울 또르륵 흘리고 말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 김토끼 쌤. 오늘도 주간업무보고 수합 왜 안 하냐고요. 내 말 안 들려요?"

"... 네?"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그렇다. 나는 머릿속으로만 우다다다 공격해서 이기고 있었다. 이 모든 건 그저 나의 재빠른 상상에 불과했다.

이제 겨우 2년 차 새내기 티를 갓 벗은 내가 저런 말을 하늘 같은 선배에게 할 리가 없었다. 오로지 상상 속의 패기만 넘치는 김토끼만 할 수 있을 뿐. 민원인들의 고성과 욕설에 다져진 나는 차마 온라인 게임동료와도 싸울 수 없었다.


이 배경엔 주무님의 조언도 또 한 몫했었다. 언젠가 또 우리끼리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김토끼쓰. 혹시나 노괭이 쌤이랑 싸울 일이 생기면 말이야, 절대 대들지 마.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하지 마.”

“… 주무님? 알고 계셨군요.”

“둘 사이 모르는 사람도 있어, 우리 사무실에?”


그녀는 맥주를 한잔 털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죄송하다 공법은 민원인들한테만 쓰는 게 아냐. 온라인 게임동료도 마찬가지야. 죄송하다. 그리고 침묵. 이거 두 개면 겉보기엔 상대방이 또 이긴 것 같지만 실제론 토끼쌤이 이긴 거야.”

“그건 또 왜요?”

“이 정글 같은 사무실에서는 말 많은 사람이 지는 거거든.”


또다시 그녀의 말은 한 번에 동의할 수 없을 만큼 알쏭달쏭했지만 내 전화응대 스킬에 지대한 공을 끼친 바 있었기 때문에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저 그런 기회가 오면 나는 과연 그녀의 조언대로 가만히만 있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상상력 덕분에 첫 단추는 제대로 끼우게 되었다. 침묵 공법 대성공.


"사람 무시하냐고요. 대답해요."

"아... 주간업무보고 수합은 곧 하려고 했는데요."

"곧 하려고 하긴. 일처리 좀 꼼꼼하게 해요. 내가 쌤 계속 챙겨줘야 하니까 힘들다고요."

"...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죄송하다는 말은 이젠 내게 너무 쉬운 말이 되어버렸다. 주무님이 시키는 대로 꽤 잘하고 있는 나 자신이 기특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꽤 성장해 있었다.

그녀는 가소롭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쉼터 주위로 몰려든 하이에나들도 내 상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진짜였다. 심각한 상황처럼 보였는지 다들 딴짓하면서도 모든 귀는 이쪽을 향해 있는 게 몹시 티가 났다. 물론 그 사이엔 주무님도 포함돼 있었다.


"나 이번에 나간다고 얘기했죠? 그리고 이번에 나 발탁 승진 대상자라서 교육감 표창이 필요해요."

"......."


'너도 승진 대상자였냐, 팀장이랑 쌍으로 잘 어울리겠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나의 입술은 무거웠다. 침묵 공법은 꽤 강력했다. 그녀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이미지에 불리한 말을 잘도 이야기했다.


"김토끼쌤은 이번이 아니어도 내년에도 또 기회가 있어요. 그때 받아가요."

"... 네, 알겠습니다."


나는 말을 고르고 골라서 겨우 대답했다. 그제야 노괭이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아참, 그리고 빼빼로 고마워요. 아침에 바빠서 내가 말을 제대로 못 한 거 같아서요."


그녀는 할 말이 다 끝났는지 슬쩍 내 어깨를 툭 밀치며 지나가버렸다. 사람들은 생각 외로 싱겁게 끝나서 아쉬운지 재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혼자 쉼터 의자에 털썩 앉아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하아...”

“여어, 김토끼. 장하다. 잘했어.”


누군가 내 옆에 똑같이 털썩 앉으며 어깨에 팔을 둘렀다.

주무님이었다.


“아... 주무님. 다 보고 계셨군요.”

“혹시 진흙탕 싸움될까 봐 뒤에서 대기 타고 있었지. 내가 한 말 잘 기억하고 있었구나?”


우리는 쉼터 창문 너머로 보이는 푸른 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표창 너무 신경 쓰지 마. 표창... 그거 그냥 종이 쪼가리야. 받으면 좋지만, 없다고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어.”

“맞아요. 표창받으려고 한 일도 아닌데요, 뭐.”

“나는 김토끼가 성장하는 게 보여서 재밌고 대단해.”


내가 승리자인 건 맞을 텐데도 어딘가 뒷맛이 씁쓸했다. 조직생활 중에 날 싫어하는 사람과는 대체 어떻게 지내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여전히 의문이다. 적은 최대한 안 만드는 게 좋지만 다들 각자의 사정으로, 각자의 취향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 학교에선 백기린처럼, 여기선 노괭이처럼.


“그러게요. 저도, 달라지는 제 자신이... 뿌듯한 것 같아요.”

“내가 표창 프린트해서 하나 줄까?”


그녀가 키득키득 웃으며 물었다.


“좋죠. ‘올해의 성장’ 표창으로 하나 부탁드려요.”

“오케이~”


그 뒤로 노괭이는 표창을 위해 후배 잡도리하는 선배 이미지가 생겼지만 곧 나갈 거라는 생각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난 주무님의 조언 덕에 동정표를 얻으며 나의 입지를 구축해 나갈 수 있었다.






몇 주 후, 표창 대상자 안내 공문이 도착했다. 나는 입안 가득 쓴 맛을 느끼며 공문을 클릭했다.


“....? 응? 이게 뭐야?”


세입분야 교육감 표창 대상자

○○시교육청 교육재정과 윤사무라이

△△교육지원청 재정지원과 김토끼

…

…


내가 교육감 표창 대상자로 발송된 것이다. 공문을 확인한 노괭이가 벌떡 일어나 팀장님에게로 포르르 달려갔다. 나도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팀장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왜... 김토끼 쌤이 명단에 있는 거죠?”


팀장님은 약간 난처하다는 듯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 맞다. 내가 과장님께 보고하는 걸 깜빡했지 뭐야.”

“....... 네?”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그만... 원안대로 결재가 났어.”


그녀는 억울한 듯 뭐라고 더 호소를 했지만 팀장님은 그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줄 뿐이었다.


“교육장 표창 있으니까, 발탁 승진엔 무리 없을 거야.”

“가점 차이가 있다니까요? 전 실적도 억 단위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다른 팀 사람들이 또다시 웅성거리며 우리 팀 쪽을 쳐다보았다. 팀장님은 몇 발자국 뒤에 서 있는 나를 보더니 찡긋 윙크를 날렸다. 노괭이는 몇 번 더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엔 씩씩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보다 먼저 조심스럽게 자리로 돌아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팀장님은 몰래 내 편을 들어준 것 같다.


‘그래도 이 조직이 내 노오력을 인정을 해주긴 하네.’


어찌 됐든, 이번만큼은 정의가 승리했다. 특히나 우습게도 팀장님의 건망증으로 포장된 이 달달한 연말 선물은 더욱 기억에 남을 것이다.



-To be continued-





이전 15화선배, 이번 표창은 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