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연휴 호캉스 후기
"명절 연휴 내내 해외를 간다고? 아니 그럼 제사랑 부모님은 어쩌고? 그거 후레자식 아니야?"
10년 전 쯤, 긴 연휴를 위해 몇달 전 마일리지로 유럽행 비행기표를 끊어놓고 명절 즈음해 부서 회의시간에 명절 계획 이야기를 나누다 해외여행계획을 털어놓자 옆팀 팀장님이 한 말이다. (과장X 완전 실화임)
그 이후 나는 우리부서의 공식 "후레자식"이 되어 명절마다 해외여행을 떠났다. 온라인 게임인이라면 알 것이다. 무박 2일, 2박 3일 이상의 연차를 연속으로 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내 일이 다 되었다고 무작정 연박으로 휴가를 때리다가는 팀원들의 소리없는 눈총을 받기도 하고, 결재 전후 팀장이 주는 은근한 압박을 견디기도 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두번 있을까말까한 연휴를 놓친다면 하루하루 버티는 미생이의 삶은 절망적이다. 그렇게라도 나가서 콧바람도 쐬고 자유를 만끽해야 다음 여행까지 미생이의 날들을 힘내어 버틸수가 있었다. 그렇게 후레자식 소리까지 들어가며 나는 꿋꿋하게 1주일이상의 여행을 다니곤 했다. 하지만 회사 "어르신" 들의 은근한 수군거림은 피할 수 없었다.
물론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연차를 쓸 때 사유를 물으면 요즘 친구들은 조용히 감사나 인사부서에 신고하기도 한다. 또 휴가 때 업무연락을 하면 그것도 신고사유라 한다. 참나. 물론 나도 저런것들을 참 "극혐"했다. 아니, 죽고사는 문제 아니면 팀이 왜 있나. 휴가갔음 좀 뒤로 미루던가. 보면 꼭 연락해서 지금 해결해야 할 것도 아닌데도 일부러 그러나 귀찮게 하는 팀장도 있었다. 하지만. 참. 신고부터 때린다는 요즘 업계 소식을 가끔 지인을 통해 들으면 진짜 격세지감을 느끼며 약간은 씁쓸해진다. 씁쓸함의 이유는 물론 라떼시절과 너무 달라서 내가 억울해서 도 한 5퍼센트 정도 있지만 95퍼센트 정도는 뭐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어서이다. 그런 거 보면 나도 이제 영락없는 꼰대다. 인정.
백수3년차. 이번 명절은 호캉스로 일찌감치 정했다. 국외여행은 몇달전 유류세 이슈로 도저히 이 돈내고 못가겠다 싶었다. 그 이후 유류세가 내리긴 했지만 연휴가 임박해서 예약하려니 가격은 여전히 터무니없었다.
아 그래? 그럼 국내 호텔에서 좀 쉴까? 싶어 찾다가 호텔을 예약했다. 엄청 고급은 아니고. 5성급이지만 그냥 딱 쉬기 좋겠다 싶은 호텔로 골랐다. 조용한 쉼을 컨셉으로 하는 호텔이었다.
이게 웬걸. 2시 반쯤 느긋이 가서 3시 체크인을 하겠거니 했더니만 인간이 마치 오래된 때가 줄줄 밀리듯이 밀집해 있었다. 하하하하하.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 어르신들을 모시고 온 자녀세대 가족 등등. 아니 이분들은 차례를 호텔서 지내려고 하시나? 아. 차례상을 안 차리는 종교있는 분들이신가? 어? 보니 커플도 있고 자매들도 있다. 젊은이만이 아니고 다양한 연령대다. 나는 번호표를 뽑았다. 체크인을 위한 번호표. 내 앞으로 대기팀이 48팀이 있었다. 오마이갓.
하는 수 없이 호텔 1층에 라운지 카페에 들어갔다. 여기는 한적함이 컨셉이라 근처에 상가가 없다. 커피 한잔이 비싸도 뭐 한 8천원 하겠지. 하고 메뉴판을 보는데 오마이갓뜨. 아메리카노가 만 이천원이다. 아니 이건 너무하잖아!!!의 짤이 내 머릿속을 파노라마처럼 지나갔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짜증남을 달달함으로 이기고자 아바라를 시켰다. 만삼천원. 으아아아아. 집앞에서 비싼 아바라를 마셔도 두잔은 마실 가격이다. 젠장 호텔. 그렇게 40분을 기다리니 내 차례가 왔다. 명절이라고 방을 업그레이드 해줬다. 오예. 분노가 조금 가셨다.
방은 뷰가 매우 잘 트여있고 깨끗하고 딱 쉬기 좋은 그렇지만 좁지는 않은 아주 좋은 컨디션이었다. 애매한 시간대로 점심을 못 먹어 룸서비스로 3만원이 넘는 파스타를 한접시 시켜 먹었고 사우나를 하고 쉬니 다음날이 되었다.
명절 당일. 나는 조식은 생각이 없어 신청하지 않았고 산바카라을 하러 내려갔다. 으아. 엘리베이터카 안 내려온다. 7시반정도인데 조식을 벌써부터 먹나? 싶었는데 그게 맞았다. 조식당은 어제 체크인처럼 대기번호표를 뽑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가족들로 가득했다. 이런. 후레자식들의 향연이란. ㅎㅎㅎㅎㅎㅎ옆팀 L 팀장님 진짜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다. 후레자식이라뇨. 대한민국에 조상 잘 만난 후레자식들이 이렇게나 많습디다요. 나는 산바카라을 하며 밖에서 훤히 보이는 조식당을 유심히 관찰했다. 아주 바글바글한 인파 속에 모두가 웃고 있었다. 이정도면 행복한 가족식탁 아닌가. 뭐 꼭 전부치고 모여서 제기 닦고 절해야 명절인가. 다같이 모여 하면 안될 질문이 언제 나올지 어떻게 받아칠지 눈치게임을 하며 불편하게 갈비찜 먹고 잡채 먹으면 행복한 명절인건가.
싶었다. 그리고 한가롭게 산바카라을 하며 생각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다양한 사정이 있다. 어쩌면 여기 온 사람들 중 최근에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도 있겠고 몸이 좋지 않은 가족도 있겠고 경우의 수를 헤아리지 못할만큼의 많은 가족의 사연이 있을테지. 그렇지만 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서로 산바카라도 하고 사진도 찍어주면서 좋은 시간을 보낸다면. 그게 최고 아닐까.
명절에 가족들이 모인다는 개념도 이제는 좀 달리 생각하기도 해야 된다. 꼭 앞에 보이는데 앉아서 밥먹어야 가족은 아니다. 떨어져 있든 모여 있든 또 어디에 모이든간에. 서로 불편하고 미워하고 싸울 바에는 서로가 편안하고 웃을 수 있고 행복하다면 그게 조상이 바라는 바 아닐까. 싶다.
이제는 후레자식의 정의를 바꿔야할 때 아닐까. L팀장님. 어찌 생각하십니까.
요즘 젤 유명한 밈이 "조상 잘 만난 후손은 다 공항에 있다"는 거라던데 알고 계실지. ㅋㅋㅋㅋ
명절에 모였다가 싸우고 맘 상하고 심지어 포털 메인에 나올 사건이 벌어지는 것보다는
맘 편하게 웃고있는 자손들이 훨씬 건강한게 아닐까요.
대한민국 모든 가족들의 평안과 행복을 응원하며, 나의 명절 호캉스 일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