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싶어서, 계산기를 두드려 봤다

퇴사 충동이 올 때 해본 3가지

by성실한 베짱이

오랜만이다. 마지막 글을 쓰고 한참이 지났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별일은 없었다. 그냥 매일 출근했고, 매일 퇴근했다. 그게 문제였다.


어느 날 아침, 사내 게시판에 공지가 하나 올라왔다.


<특별퇴직 시행 안내>
1. 관련근거
(중략)
4. 퇴직위로금: 0억

숫자를 보는 순간 심장이 뛰었다. 17년 전 합격 전화를 받았을 때보다 더. 들어올 때보다 나갈 때 더 떨리는 회사라니. 멋지구먼.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지금이야.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나가고 싶은 사람은 못 나가는 제도┃

공고를 끝까지 읽다가 웃음이 났다. 신청한다고 다 나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래 3가지 조건 중 최소한 하나는 만족해야 나갈 수 있다.

성과평가 하위자

장기 승진누락자

업무 부적응자.


나는 성과평가가 나쁘지 않다. 승진이 아주 늦은 것도 아니고, 부적응이라 판단하기에 17년이나 적응해 버렸다.


나는 성실해서, 나갈 수가 없다.


필명을 ‘성실한 베짱이'로 지은 날의 나에게 묻고 싶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냐고. 공지를 읽고 생각이 필명에 까지 다다를 무렵, 동기 형에게 전화가 왔다.


"봤냐? 특별퇴직? 아.. 진짜 나가고 싶다."

"나도… 완전 나가고 싶어. 이런 기회 이제 앞으로 없을 것 같은데. 마지막 기회 같아. 근데 나갈 수 있을까?"

"ㅋㅋㅋ 일단 내일 출근해서 바카라상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아악~ 소리를 질러. 부장이랑 큰 소리 내며 싸워. 그리고 임원 면담 중에 나가고 싶다고 말해. 그럼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봤다. 노조에 하소연도 해봤다. 조건 없이 내보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회사와 더 협상해 보라고.


결론적으로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다. 약간의 거짓말에 동정심이라는 조미료를 살살 뿌리면 훌륭한 메인 디쉬를 만들 수 있을 듯했다.

제 평생 꿈이 공부였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역사를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도와주세요 본부장님.
이민을 계획 중입니다. 1년 후 밴쿠버로 이민 갑니다.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런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도와주세요 본부장님.


뭐 이런 방법들… ㅎㅎㅎ


┃ 17년 만에 처음 해본 계산 ┃

나는 남의 노후를 계산해 주는 일을 한다. 17년 동안 수많은 회사의 퇴직연금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준비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정작 내 노후는 한 번도 제대로 계산해 본 적이 없었다. 의사는 자기 병을 못 고친다더니, 연금하는 사람은 자기 연금을 안 본다.


처음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위로금을 받고 지금 나가면 어떻게 되는지. 결과는 간단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쉬면, 50대 초반에 통장이 바닥난다.


1년만 쉬면 다시 일자리를 쉽게 찾을 것 같았다. 근데 그건 내 마음이 한 말이지, 숫자가 한 말이 아니었다. 숫자는 명확히 말하고 있다. 위로금은 빠르면 5년, 늦어도 7년 이내에 반드시 바닥난다고. 빨라지면 빨라지지 느려지진 않는다고. 역시… 회사가 퇴직위로금을 괜히 이렇게 정한 게 아니다.


┃ 퇴사 충동이 올 때 해본 3가지 ┃

2주 동안 흔들리면서 해본 것들이 있다. 혹시 지금 사직서를 서랍에 넣어두고 있는 분이 있다면, 속는 셈 치고 한번 해보시라.


1. 숫자로 확인하기

"그만두고 싶다"는 감정이고, "그만둬도 된다"는 계산이다. 둘은 다르다. 나가면 매달 얼마가 필요하고, 가진 돈으로 몇 년을 버틸 수 있는지 한 번만 적어보면 된다. 숫자는 차갑지만 거짓말은 안 한다. 너무 차가워 정신이 번쩍 들 거다.


2. 시장에 물어보기

"나가도 금방 구하겠지"라는 생각이 들면, 회사를 다니면서 확인해 보면 된다. 헤드헌터에게 이력서를 보내고, 어떤 자리가 오는지 들어보는 거다. 좋은 제안이 오면 그때 나가도 늦지 않다. 안 오면? 지금 안 게 다행이다. 난 헤드헌터가 볼 수 있는 이력서를 업데이트하다가 포기했다. 이거 진짜 귀찮다. 회사 일도 귀찮아서 퇴사하고 싶은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3. 작은 출구 만들기

이게 제일 중요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회사를 떠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회사밖에 없는 내 삶에서 잠깐 숨을 쉬고 싶었던 거다. 작은 문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다시 글을 쓰는 것.


┃ 결국 남았다 ┃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회사에 남기로 했다. 위로금 앞에서 쿨하게 돌아선 건 아니다. 솔직히 아직도 조금 아깝다. 하지만 이제 안다. 지친 건 회사 때문만이 아니었고, 그만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는 걸. 그만두는 용기만큼, 남아서 숨 쉴 구멍을 만드는 용기도 필요하다. 다시 글을 써보려 한다. 회사에서 버티는 법, 흔들리는 법, 그리고 월급 말고 나를 지키는 법을 찾아가는 여정에 대해서.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성실한 베짱이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