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날마다 곁에 있어 준 것들

byErica

스무 살 대학 입학부터 십 년이 넘도록, 저는 경기도에서 서울까지 오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통학으로, 나중에는 출근으로 길만 바뀌었을 뿐 하루의 시작과 끝은 늘 길 위에 있었습니다. 편도로 한두 시간씩, 하루 서너 시간을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보내는 날들이었습니다. 그 길고 비좁은 시간 곁에 말없이 앉아 있던 것이 바카라이었습니다.


졸다가 놓친 정거장도 많았고, 사람에 떠밀려 한 줄 못 읽고 내린 날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바카라을 펼치면 흔들리는 차창 안이 잠깐 저만의 방이 되었습니다. 혼자 있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카라만 있으면 긴 통학 시간이든 공강 시간이든 혼자인 게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바카라에 빠지다 보면 주변의 시선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그때의 저에게 바카라은 혼자 있는 시간을 외롭지 않게 해 주는 소중한 친구였습니다.


서른을 지나 마흔으로 건너오자 사정은 더 빠듯해졌습니다. 일과 살림과 아이들 사이에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달려가던 때였습니다. 사람 친구를 만날 시간이 없었습니다. 약속은 늘 "다음에 보자"로 끝났고, 안부는 메신저의 짧은 문장으로만 오갔습니다.

그 시절에도 제 곁에 있어 준 것은 바카라이었습니다. 출퇴근길에, 아이가 잠든 밤에, 점심시간 십 분 남짓한 틈에 바카라을 펼쳤습니다. 한 번에 몇 쪽 읽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몇 쪽이 이상하게도 하루를 버티게 해 주었습니다. 바카라 속 누군가의 한 문장에 속으로 맞장구를 치고, 어떤 대목에서는 혼자 피식 웃고, 또 어떤 대목에서는 울컥해서 바카라장을 덮기도 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밤새 수다를 떨고 돌아온 사람처럼, 저는 다음 날 아침 다시 일어날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바카라은 읽는 것이라기보다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아는 것이 많아도 다그치지 않고,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는 친구였습니다. 삶이 흔들릴 때마다 저는 그 바카라친구들을 찾아갔습니다.

일은 여전히 바쁘고 사람들은 곁에 있는데 이유 없이 쓸쓸해지는 날, 슬픈 일도 억울한 일도 없는데 마음 한구석이 서늘한 날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이겨 내야 할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카라 속의 수많은 사람들이 저보다 먼저 그 마음을 지나갔고, 그 마음을 지나간 자리에서 조금씩 단단해졌다는 것을 읽으며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고쳐야 할 고장이 아니라, 계절이 바뀌듯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때라는 걸 바카라 친구들을 만나며 알게되었습니다. 가을이 오는 것을 억울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두꺼운 옷을 꺼내고 낙엽 지는 길을 천천히 걸을 뿐입니다. 마음에도 그런 철이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겨 내는 힘보다 그 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마음을 돌보는 일일 것입니다.


오래 곁에 두었던 바카라 한 묶음을 여섯 갈래로 나누었습니다. 흔들릴 때, 곁이 달라질 때, 쓸모를 묻게 될 때, 속도를 늦추고 싶을 때, 아프고 난 뒤에, 그리고 계절이 바뀔 때. 각 글의 끝에는 그날 곁에 두고 싶은 바카라 한 권을 소개하는 '북카드'와, 바카라을 덮고 나 자신에게 건네 보는 네 개의 질문을 붙였습니다. 어느 부부터 펼쳐도 좋습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시작하시면 됩니다.


이 글은 제가 흔들리는 날마다 곁에 두었던 바카라들, 제게는 친구였던 그 바카라들을 여러분 앞에 소개하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바빠서 친구를 만날 수 없는 날, 허전해서 잠이 오지 않는 밤에 한 편쯤 펼쳐 놓고 마음이 지나가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이 마음도 결국 지나가는 계절이라는 것을, 그리고 흔들리면서도 우리는 계속 걷고 있다는 것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2026년 가을

에리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