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20. 꾸준함과 최선은 배신하지 않는다

2년 11개월만에 이룬 몰기, 그리고 내일도 활터에 가는 이유

by정성현

20. 꾸준함과 최선은 배신하지 않는다

2년 11개월 만에 이룬 몰기, 그리고 내일도 활터에 가는 이유


2026년 9월 29일 오전 10시 35분.

우암정 활터에서 마침내 ‘5시 5중’을 했다. 다섯 발을 쏘아 다섯 발 모두 과녁에 맞혔다.

국궁에서는 이것을 ‘몰기’라고 한다.

KakaoTalk_20261022_072105428_03.jpg

2023년 10월 13일 국궁에 입문했으니, 2년 11개월 만에 이룬 일이다.

처음 활을 잡았을 때는 몰기가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다. 일주일 만에 해내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그런 사람들과 비교하면 나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 나보다 먼저 국궁을 시작하고도 아직 몰기를 하지 못한

사람도 있으니, 사람마다 배우는 속도가 다른 모양이다.

그래도 솔직히 아쉬운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조금만 더 일찍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서두른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다.

내 몸에 맞는 속도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매일 쏘아도 매일 새롭다. 국궁은 참 묘한 운동이다.

오랫동안 활을 쏘았다고 해서 다음 날도 저절로 잘 쏘아지는 것은 아니다.

어제 잘 맞던 화살이 오늘은 과녁을 빗나간다. 자세가 조금 달라졌는지, 활을 당기는 힘이 달라졌는지,

마음이 앞서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국궁은 평생 배워도 매일 다시 배워야 한다는 말이 있다.

활터에 다니다 보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씩 알 것 같다.

활을 쏘는 일은 단순히 팔에 힘을 주고 시위를 당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발을 어떻게 딛는지, 몸을 어떻게 세우는지, 호흡을 어떻게 가다듬는지에 따라 화살의 방향이 달라진다.

마음이 급해지면 몸도 따라 급해진다.

잘 쏘고 싶은 욕심이 앞서면 오히려 자세가 흐트러진다.

그래서 요즘은 조급한 마음을 경계한다. 빨리 잘 쏘겠다고 무리하다가 몸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활터에 나오는 것조차 어려워질 수 있다. 한 번의 좋은 기록보다 오래도록 활을 쏠 수 있는 몸을 지키는 일이 먼저다.

아직 배울 것이 많다. 어쩌면 국궁을 하는 동안에는 늘 그럴 것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활터로 간다

나는 출근하듯 매일 우암정 활터에 간다.

눈이 와도 가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간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집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웬만하면 활터로 향한다.

이제는 내가 머뭇거리면 아내가 먼저 묻기도 한다.

“오늘은 활터에 안 가요?”

어쩌면 아내는 내가 활터에 가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내가 그렇게 자주 갈 줄 몰랐을 것이다. 나 역시 이렇게 오랫동안,

거의 매일 활터를 찾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어느새 하루 일과 속에 활터가 자리를 잡았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는 곳이 아니라,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곳이 되었다.

활터에 다녀와야 하루가 제대로 시작되거나 마무리되는 것 같은 날도 있다.

물론 매일 가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화살이 잘 맞고,

어떤 날은 다섯 발을 쏘아도 마음에 드는 화살 하나 건지기 어렵다. 그래도 괜찮다.

오늘 잘 맞지 않았다고 내일도 그러라는 법은 없고, 오늘 잘 맞았다고 내일도 잘 맞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저 다시 가서 쏘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다.


우암정 활터가 좋은 이유

내가 우암정 활터를 좋아하는 데에는 활쏘기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다.

산속에 자리한 활터에 들어서면 마음이 조금 차분해진다. 가끔은 산속 절에 기도하러 온 것 같은 기분도 든다. 활을 쏘기 전 잠시 가만히 앉아 있으면 복잡했던 생각이 하나둘 가라앉는다.

누가 시켜서 마음을 비우는 것도 아니다. 특별한 명상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활터에 앉아 있을 뿐인데 마음이 편안해진다.

집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와는 다르다. 해야 할 일, 걱정거리, 지나간 일들이 머릿속을 맴돌다가도 활터에 앉아 있으면 잠시 멀어진다.

활을 쏘는 순간에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과녁을 바라보고, 자세를 잡고, 호흡을 가다듬고,

시위를 당긴다. 온 신경이 눈앞의 일에 모인다.

화살이 과녁을 맞히면 기분이 좋다. 빗나가면 아쉽다.

하지만 화살이 어디로 날아갔든 활을 내려놓고 나면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나는 이런 시간이 좋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을 편히 내려놓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누군가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낄 필요도 없다.

그저 내 몸으로 활을 쏘고, 내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면 된다.

우암정 활터는 내게 그런 곳이다.

늦게 이루었다고 실패한 것은 아니다


2년 11개월 만에 이룬 몰기.

일주일 만에 해낸 사람과 비교하면 나는 분명 늦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시간을 아깝게만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동안 과녁을 빗나간 화살이 얼마나 많았을까. 잘 쏘고 싶은 마음에 자세를 고쳐 보고,

뜻대로 되지 않아 아쉬워하고, 다음 날 다시 활터에 나갔다.

그렇게 하루하루 쌓인 시간이 오늘의 다섯 발을 만들었을 것이다.

몰기를 했다고 해서 이제 활쏘기를 다 배운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 더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의 성취가 내일도 이어지리라는 보장도 없다.

다시 다섯 발을 쏘면 한 발도 맞히지 못할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한 번 해냈다는 사실도 기쁘지만, 그날까지 활터에 꾸준히 나왔다는 사실이 더 뿌듯하다.

않는 날에도 그만두지 않았고, 남들보다 늦다는 생각이 들어도 내 자리를 지켰다.

살다 보면 남들보다 늦게 이루는 일이 있다.

젊을 때는 남보다 앞서고 싶었고, 남들만큼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알게 된다. 모든 일에 남과 같은 속도로 갈 필요는 없다는 것을.

누군가는 일주일 만에 해내고, 누군가는 몇 년이 걸린다.

중요한 것은 남이 얼마나 빨리 해냈느냐보다 내가 그 일을 얼마나 오래, 성실하게 이어갈 수 있느냐일 것이다.

나는 이제 그 사실을 활터에서 배우고 있다.


내일도 우암정으로 간다

2026년 9월 29일 오전 10시 35분.

KakaoTalk_20261022_072105428_02.jpg

내게는 오래 기억하고 싶은 시간이다. 다섯 발의 화살이 모두 과녁에 꽂힌 순간도 기뻤지만,

그보다 더 마음에 남는 것은 포기하지 않고 그날까지 왔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화살은 자주 빗나갈 것이다.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날도 있을 것이고, 몸이 따라주지 않는 날도 있을 것이다. 오늘의 기록을 다시 내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내일 우암정 활터에 갈 것이다.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가고, 비바람이 불면 날씨를 살펴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가고,

몸이 좋지 않은 날에는 쉬어 가면서 오래 활을 쏘고 싶다.

몰기를 했다고 갑자기 대단한 궁사가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오랫동안 해온 일이 한 번 좋은 결실을 맺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꾸준함과 최선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믿고 싶다.

그 믿음이 언제나 원하는 결과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과는 다른 시간을 만들어 준다.

하루하루 활터에 나간 시간은 내 몸에 남고, 자세에 남고, 마음에 남는다.

그리고 가끔은 이렇게 다섯 발 모두 과녁에 꽂히는 날도 찾아온다.

나는 그날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내일도 활터에 간다. 다시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활을 잡을 것이다.


#몰기 #5시5중 #우암정 #국궁장 #활터 #꾸준함과최선은배신하지않는다 #활 #활쏘기

이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작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저작물을 공유, 게재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brunch membership
정성현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한울림 평생현역 정성현의 온라인카지노입니다. 은퇴 후 행복한 노후 30년을 이끄는 아름다운 삶 이야기.

1,457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1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66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21화<19편>준비되지 않은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