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봐서 아는데 말고

매일 밤 손바닥만 한 그림 한 장으로 나를 되찾은 기록

by박윤경
가까워.png질문. 가까워지고 있을까요, 멀어지고 있을까요? 어디에서 그렇게 느꼈나요?


번아웃일까, 갱년기일까. 몸과 마음이 완전히 멈춰 버렸다. 건강검진을 받아도 원인이 없다고 했다. 요가와 헬스로 몸을 챙겼지만, 운동을 할 때뿐 내 상태는 달라지지 않았다. 목적 없는 글쓰기와 노래 부르기로 생각을 다독였지만 차도가 없었다. 마음이 고장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심리상담사를 찾았다.


상담사는 첫날 여러 가지 검사를 했다. 검사가 끝나자 자신은 컨설턴트가 아니라고 했다. 앞으로 별말하지 않을 거라고, 필요한 질문으로 길을 안내하겠지만 답은 스스로 찾게 될 거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매주 50분 동안 상담사는 별말하지 않았다. 상담사의 짧은 질문에 나는 길고 지루한 답을 했다. 비밀이 보장된다고 생각하니 못 할 말도 없었다. 매주 혼자 말하고, 흐느끼고, 화내고, 깨닫기를 반복했다.


신기했다. 상담사의 질문 두세 개와 상담을 마치며 건네는 한마디면 충분했다. 한 주 동안 말하며 깨달은 것을 되새기고, 숙제를 실천하며 다음 상담을 기다렸다. 상담사는 1년 이상을 예상했지만, 마음이 괜찮아지면 자연스럽게 상담의 우선순위가 뒤로 밀릴 거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5개월쯤 지나자 상담에 가는 날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 빈자리에 매일 밤 듣고 싶은 말을 제목으로 정하고, 제목에 어울리는 새를 그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리고 쓰다 보니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마디가 떠올랐다. 공부하느라 지친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회사에서 속상한 일을 겪은 친구에게 건네고 싶은 이야기, 사춘기 아이와의 갈등으로 힘든 날을 보내는 동생에게 해 주고 싶은 말. 매일 밤 보듬고 싶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런 날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그렸다. 그 그림과 이야기를 SNS에 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듣고 싶은 말, 내가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는데, 꼭 내 마음 같다는 반응들이 쌓였다. 헛헛하고 노곤할 때는 물론, 가득하고 뿌듯할 때도 그저 한마디면 충분했다. 요란하게 쏟아지는 축하와 위로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듣고 싶고 하고 싶은 딱 한마디는 선을 지키며 위로하고, 응원하고, 축하했다.


고민을 털어놓으면 '해 봐서 아는데' 하는 무용담이나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했대' 하는 들은 이야기로 버티라고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대신 간단하고 뭉근하게 따뜻한 한마디와 어깨를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답 대신 질문 하나를 건네고, 답은 스스로 찾을 때까지 기다려 주고 싶다. 이왕이면 기가 막히게 타이밍을 맞추는 관심과 함께. 그 50분 동안 상담사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에바 알머슨 <함께>를 보고

최은영 『밝은 밤』 (문학동네) 299p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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