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손바닥만 한 그림 한 장으로 나를 되찾은 기록
가슴속에 불꽃이 활활 타올랐던 걸까. 당시 로펌 CI는 블루 계열이 대세였는데, 우리 특허법인 CI에는 레드로 포인트를 주었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내 자리 벽면엔 빨강 유리 보드를 설치하고, 검정 보드마카 대신 흰색 보드마카로 회의를 했다. 가슴속에 열기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걸까. 월넛 무늬 벽면에 금장 간판이 대세였던 그때, 특허법인 내부에 유리 벽을 세우고 흰색 대리석 바탕 간판을 올렸다.
천방지축 튀어 오르는 말썽꾸러기로 보였던 걸까. 두더지 게임기의 튀어 오르는 두더지처럼 가열차게 방망이질을 당했다. 포인트만 빨강이고 싶었는데 온통 피범벅의 빨강이 되었다. 구성원의 성향과 담당자의 선호를 반영했을 뿐, 누구를 향한 반항도 아니었는데.
오늘 아침을 밝힌 ‘마크 로스코’의 <레드>를 모니터 화면에 띄워두고 오랜만에 한참을 멍하게 앉아있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레드는 불구덩이 같았던 그때의 나를 불러왔다. 그때 그랬었지. 나는, 우리는 왜 그랬을까. 굽혔다면 달라졌을까. 그들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답 없는 질문으로 고요의 붉은 바다가 나의 아침을 채웠다.
얼마 전 좋아하고 존경하는 대표님과 함께 이동하며 좌충우돌 돌아이 같던 내 과거를 이야기했다. 최근 새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는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첫 바카라 『날지 않아도 괜찮아』 준비하면서 이미 실컷 썼고, 굳이 꺼낼 이유도 없고, 듣는 사람이 기분 좋을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은 하고 싶었다. 과거의 나를 현재의 나와 분리해서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오늘 아침 마주친 레드 앞에서도 시간은 필요했지만, 금방 현재로 돌아왔다. 그림을 그리고 또 보러 다니기 시작하면서 색을 되찾았다고 생각했다. 무채색이었던 일상이 다채로워졌다고 믿었다. 그런데 멀리 치워둔 색이 있었다. 바로 레드. 파스텔 상자 속 빨강은 늘 새것이었다.
일상이 달라지고 색도 되찾았지만, 세상살이는 또 다른 두더지 게임이다. 언제 나갈까 두근두근 설레고, 타이밍을 잘못 잡아 두들겨 맞고, 다시 나갈 준비를 하는 게임은 계속된다. 그래도 이제 노는 판이 달라졌다. 나는 더 이상 두더지 게임기 속 두더지가 아니다. 숲 속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노는 두더지.
파스텔 상자를 열었다. 한 번도 닳지 않은 빨강을 집어 들었다.
그래, 이제 레드의 금지를 풀 때가 되었다.
마크 로스코 <레드>를 보고
오르한 파묵 중 『내 이름은 빨강』(민음사)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