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지 열흘은 하는 사람
시어머니 없는 열흘간, 가족의 아침과 저녁을 바카라임지고 있다.
이렇게 쓰고 나니 너무 민망하다. 결혼한 지 16년, 엄마가 된 지 만으로 꼬박 12년이 되었는데 아침과 저녁을 하는 게 무슨 대수라고. 변명을 대신할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며느리인 내가 아침을, 시어머니가 저녁을 하는 게
동거 15년, 주방과 욕실, 화장실마저도 같이 쓰는 2세대 주택¹인 우리 집의 오랜 룰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K-장녀 출신으로 집안일의 솔선수범이란 몸에 배어 있는 것이라서
'어머니, 제가 할게요'
'어머니, 앉아만 계세요'
'어머니, 뭐 도울 것 없을까요'
했지만, 주부 50년, 영양사 경력 40년인 시어머니의 눈에 햇병아리 외국인 며느리의 밥상이 성에 찰 리 없었고, 그럼에도 내가 식사를 준비한 날이면 어김없이
'다시²는 어디다 뒀냐, 늘 여기에 두는데'
‘도마는 왜 이리 세워놨냐, 칼은 이렇게 넣어야지’
하는 2절을 들어야 했다.
당하기만 했을쏘냐.
나는 나대로 금방 먹을 음식에도 랩을 씌우고, 먹을 수 있는 브로콜리 꼬다리나 대파 잎을 삼각 코너³에 텀벙텀벙 버리는게 못마땅해 '그걸 왜 버리세요', '다 먹을 수 있는 건데' 하는 소리를 시어머니 어깨너머로 던지곤 했다.
나야말로 설탕이 들어간 달달한 계란말이보단 소금 간이 좋았고,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기무치⁴ 말고 진짜 김치가 먹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이 집안 남자들은 뭘 하고 있었나… 라는 중대한 문제도 있지만, 그건 또 다른 큰 꼭지이기에 다음에 깊이 다루기로 하고)
나중에서야 우리는 일본의 아츠야키 타마고(厚焼き玉子)⁵는 단맛이 베이스라는 걸, 한국에선 파송송 넣어 짭쪼릅한게 국룰이라는 걸 식탁 위 반찬삼아 웃으며 오해를 풀었지만 말이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내 손으로 만들고 싶은 이유식에 감 놔라, 배 놔라 이러쿵저러쿵.
어설픈 초보 엄마를 지켜보는 어머니는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이며,
첫아이를 키우는 나는 나대로, 설익은 정보들일지언정 밤새 찾아보고 내 손으로 해 보고 싶은 그 마음이 얼마나 컸을지.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주관 대신 제3자에게 판결을 맡기기로 했다.
영아를 키우는 엄마들을 타깃으로 하는 일본의 국민 육아 잡지 『히요코 클럽』⁶ 최신호를 하나 사다 놓고,
○개월에 먹어도 되는 식재료, 크기, 조리법이 한눈에 들어오는 도감 부록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논쟁이 있을 때마다 법전처럼 펼쳐 사용하곤 했다.
'히요코 클럽에서는 갈아서 먹어도 된다는데요'
'히요코 클럽에서는 아직 안 된대요. 만 1세가 되고 먹여야 된대요'
그놈의 히요코 클럽, 히요코 클럽…
지금 생각해 보면 이건 완전히 시어머니가 나를 봐줬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안 키워 봤을까, 당신이 그걸 모를까.
그럼에도 요즘은 이렇답디다 하는 며느리의 주장을 '하이하이(그래그래)' 하며 들어준 것이겠지.
결국 그 부록은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졌지만, 찢어진 걸 테이프로 잇고 붙여서 둘째가 태어나 라운드 2가 시작되었을 때도 요긴하게 썼더랬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없듯, 한 주방에 두 여자가 서선 안 된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래서 나는 자발적 순종 모드로 돌입했다. 여기는 일본, 나 빼고 모든 사람이 일본 입맛에 맞춰져 있는 데다 상대는 50년 경력의 주부, 40년 경력의 영양사 출신이다.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은 부딪히지 말고 우회하자.
나는 일을 핑계로 어설프게 주방에 서지 않고, 요리 실력 대신 리액션 실력을 키우기로 했다.
'엄청 맛있어요, 어머니!'
'이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어머, 굴소스는 저는 잘 못 쓰겠던데… 역시 우리 요코 상!' (쌍따봉!)
그런 나의 노력이 가상해 보였는지, 시어머니도 한발 물러나 아침의 주방은 나에게 열어 주었다.
5시에 일어나는 나보다 한참 전에 일어나셨을 게 분명하지만, 내가 밥을 차리기 전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으로 무언의 허가를 내리신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15년 평화협정이 유지되고 있다.
아침은 내가, 저녁은 어머니가.
그런 시어머니가 열흘간의 크루즈 여행을 떠났다.
물론 지금까지도 크고 작은 국내 여행, 3박 4일 대만 여행, 일주일이 넘는 뉴질랜드 여행 등으로 시어머니가 없는 저녁은 종종 있었지만, 이번엔 내가 달랐다.
매번 한두 번은 해도 바쁘다는 핑계로 외식을 심심찮게 끼워 넣었고, 그러다 보면 눈 가리고 아웅으로 3박 4일 정도야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시어머니도 나에게 직접 묻지 않고 애들 입을 통해 '할미 없는 동안 뭐 먹었어~ 잘 챙겨 먹었어?' 유도 심문을 하면, 해맑은 아이들은
'스시로 다녀왔어!' (100엔 회전초밥집)
'마루가메 먹고 왔어' (우동 체인점)
순도 높은 투명함으로 부재중의 저녁 메뉴를 읊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눈치 챙긴 남편이
‘엄마가 함바그도 해줬잖아’ 한 마디 끼워 넣으면 그제야
‘아 ~ 맞다’ 하고 추임새를 넣는 6학년 큰 딸.
별수 없다 생각했다.
모든 걸 다, 완벽히 할 순 없으니까.
스물다섯, 졸업과 동시에 결혼해서 입맛도 취향도 다르게 살아온 일본 가족들의 저녁을 온전히 바카라임지기엔 나는 너무 어설펐고, 아침만 차려 주는 반쪽짜리 엄마로 산 지 오래되어 진화해 볼 겨를도 없이 저녁밥 하는 기능이 퇴화해 버렸으니. 무엇보다 주방의 神신, 시어머니가 계시는 한 핑계도 있고 명분도 충분했으니까.
그래도 이번엔 한번 넘어 보고 싶었다.
어차피 기간 한정, 열흘만 해 보지 뭐.
물론 걱정도 됐다. 아침 메뉴야 호텔 조식 같은 거라 빵 있고 밥 있고 시리얼 있으면 어떻게든 돌아가기 마련인데,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은 입맛, 취향, 분량, 조합을 다 고려해야 하는 엔터테인먼트 사업 아니던가. 망아지 수준의 내가 과연 몇 개의 메뉴를 만들 수 있을까.
카레, 규동, 우동…
가라아게, 돈가스, 교자…는 사면되고…
해봄 직한 것들을 나열하니 자취생 집밥 수준밖에 안 됐지만, 잘하는 건 됐다. 그저 하기나 하자. 그렇게 해서 차린 첫 저녁이 일본의 국민 가정식, 흰쌀밥에 미소된장국, 연어 소금구이 정식. 식탁의 색감을 북돋아 줄 샐러드와 가지구이도 곁들여서.
자기만족용으로 사진과 동영상을 찍다 보니 남기고 싶어 인스타에도 올려 본다.
박제해 두고 나니 이제 진짜 나머지 아홉 번의 밤도 채워야 한다는 무게감이 밀려왔다. 나와의 약속을 지켜 보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했는데, 몇몇 분들의 응원 댓글까지 더해져 뜻하지 않게 〈시어머니 없는 열흘간〉을 매일 저녁 연재 중이고, 이제 세 번의 밤을 남겨 두고 있다.
맞물려 얼마 전 읽었던, 일본 브라운관 시대의 전성기를 이끈 당대 최고의 여배우 나카무라 메이코(中村メイコ)가 쓴 『메이코의 식탁』의 도시락 일화가 떠올랐다.
毎朝5時半に起き上がり小法師のようにパッと起き出して、スリッパの音をパタパタと響かせながら動きまわる。スリッパの音がまるで「私、忙しいの、働いてるの」と叫んでいるかのように聞こえた、とはづき(次女)は言います。
…
学校は六本木にありました。美味しいパン屋さんなどいくらでもみつけられるし、たまにはそんなパン屋さんのパンも食べたかったでしょう。それ以上に、あなたたちのためにこんなに頑張っているのよ、というお仕着せがましさのようなものをはづきは感じていたのだと思います。
…
たしかに、お弁当づくりは私にとって、大げさに言えば、生きるうえでのよりどころだ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仕事も家事もこなすとなれば、肉体的にも精神的にもきついし、そのうえ、大酒飲みと来ているのだから、もし1回でもお弁当作りをサボったら、次も、また次も、と何か理由をつけてサボっちゃうでしょう。二日酔いだ、台詞の覚えなくちゃならない、睡眠不足だ、とサボる理由には事欠きません。
…
もしお弁当作りを放棄したら、夕飯の支度も、部屋の片付けも、お掃除も、箍(たが)が外れたかのようにサボり出して、とめどなく落ちていくのではないかという恐怖心がどこかにあったのだと思います。
『メイコの食卓 おいしいお酒を、死ぬ日まで。』
「砦」とお弁当作りより
KADOKAWA、2014年3月
매일 아침 5시 반,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슬리퍼 소리를 탁탁 울리며 집 안을 돌아다닌다. 그 슬리퍼 소리가 마치 "나 지금 엄청 바빠, 일하고 있어" 하고 외치는 것처럼 들렸다고 하즈키(차녀)는 말합니다.
…
학교는 롯폰기에 있었습니다. 맛있는 빵집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 테고, 가끔은 그런 빵집의 빵도 먹고 싶었겠지요. 그보다도 '너희를 위해 엄마가 이렇게 애쓰고 있단다' 하는, 떠미는 듯한 생색 같은 것을 하즈키는 느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
맞아요, 도시락 만들기는 제게,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살아가는 버팀목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일도 집안일도 해내려면 몸도 마음도 고단한데, 거기에 술고래이기까지 하니, 만약 한 번이라도 도시락을 거르면 다음에도, 또 그다음에도 무슨 핑계를 대서든 거르게 되겠지요. 숙취다, 대사를 외워야 한다, 잠이 모자라다… 거를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
만약 도시락 만들기를 놓아 버리면 저녁 준비도, 방 정리도, 청소도 고삐 풀린 듯 손을 놓게 되고, 끝도 없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어딘가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메이코의 식탁: 맛있는 술을, 죽는 날까지』 중 「'보루'와 도시락 만들기」에서
※원서: 中村メイコ, 『メイコの食卓 おいしいお酒を、死ぬ日まで。』, KADOKAWA, 2014년 3월. 한국어 제목은 필자 번역.
당대의 슈퍼스타가 도시락 만들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는 이유다. 그것도 스물여덟부터 쉰여섯까지 28년간, 세 아이를 키우면서 말이다. 그런 그녀가 여든을 앞두고 쓴 바카라『메이코의 식탁』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어쩌면 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메이코에게 도시락이었다면, 나에게는 열흘의 저녁밥.
나랏일을 하는 것도,
브라운관을 비추는 여배우도 아니지만,
나는 나대로 기간 한정 열흘간의 약속을 지켜 내는 중이다.
이제 이틀 뒤면, 당신이 없는 동안 앙큼한 며느리가 이런 깜찍한 도전을 했다는 걸 알 리 없는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앉혀 놓고 탐문 수사를 하며 어떤 얼굴을 할지. 퍽 궁금해지기도 하면서.
마지막 열흘째 밤은 돌아오신 시부모님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파티상을 차려 봐야겠다.
덧.
한 가지 걱정인 것은, 그동안 '몰라요~ 못해요~'를 요령껏 핑계 삼아 왔는데, 너 제법이로구나 하시며 저녁 주방까지 내주시진 않을까, 그게 걱정이다.
아니에요 어머니, 저는 아직도 어머니 밥이 제일 맛있으니,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제발~
¹ 2세대 주택(二世帯住宅):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한 건물에 함께 사는 일본식 주택 형태.
² 다시(出汁): 가쓰오부시·다시마 등으로 우린 일본식 육수.
³ 삼각 코너(三角コーナー): 일본 싱크대 구석에 두는 삼각형 음식물 쓰레기 거름망.
⁴ 기무치(キムチ): 일본 현지 입맛에 맞춰 단맛을 더한 '일본식 김치'를 가리키는 말.
⁵ 아츠야키 타마고(厚焼き玉子): 두툼하게 부친 일본식 달걀말이. 설탕을 넣어 달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⁶ 『히요코 클럽(ひよこクラブ)』: 영아기 아이를 키우는 부모를 대상으로 한 일본의 육아 잡지.
<시어머니 없는 열흘간>
시어머니 없는 열흘간, 주방을 접수한 며느리가 내키는 대로 느슨~하게 차리는 밥상 기록 (기간 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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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인간 (도쿄거주 | 한일부부)
일본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
귀염둥이 딸 1호 2호에,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여섯 식구가 뒤죽박죽 2세대 동거 중
반경 5미터의 이내의 신변잡기성 일기가 글이 될 수 있을까를 매번 고민하며,
그럼에도 다꾸 하는 마음으로 잊고 싶지 않은 오늘을 정성스럽게 글로 엮는 걸 퍽 좋아하는 만년 작가 지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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