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가 아직 차가운 아침, 배낭을 둘러메고 집을 나선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면 먼저 나온 친구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반가운 얼굴을 마주하며 인사를 나누고, 오늘은 누가 오는지 서로의 얼굴을 살핀다. 그렇게 우리의 정기 산행이 시작된다.
매월 둘째 주 토요일은 무조건 비워두기. 우리들의 약속이다. 물론,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친구들이 더 많지만, 꾸준히 자리를 지키는 친구들이 있기에 정기 산행은 7년째 이어지고 있다. 산악회를 만들고 리더를 맡은 덕분에 친구들과의 산행을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
배낭에는 김밥이며 과일이며 먹을거리를 잔뜩 넣었다. 도봉산 계곡에 도착하면 물소리가 들리는 자리를 골라 앉곤 했다. 배낭을 풀어 음식을 꺼내 놓고 친구들과 먹고 웃다 보면 시간이 금세 흘렀다. 산을 얼마나 올랐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산을 오르는 일보다 함께 먹고 노는 시간이 더 좋았다. 내려올 것을 왜 올라가느냐고 묻던 나였다. 산 입구에서 쉬기 좋은 자리를 찾아 앉아 있다가 내려오는 것이 등산의 재미라고 생각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더니, 우연한 기회에 산악회에서 활동하는 친구를 따라나섰다가 제대로 된 산행을 경험하게 되었다. 산행이란 이런 것이었구나. 이래서 내려올 것을 알면서도 그토록 힘들게 올라가는구나. 비로소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때는 사춘기도 아닌데 마음이 사춘기보다 더 심하게 요동쳤다. 별일 아닌 말 한마디에도 마음이 상했다.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일인데도 자꾸 마음에 걸렸다. 혼자 있고 싶다가도 외로웠고, 괜찮다가도 문득 울적해졌다. 나조차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사춘기보다 더 무섭다는 갱년기 증상이었다. 내 마음조차 어쩌지 못해 답답하던 시절, 등산을 알게 된 것은 내게 큰 변화였다. 산을 오르는 동안만큼은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나를 괴롭히던 감정과 매번 씨름하지 않아도 되었다.
문제는 산에 빠져들면서 생겼다. 주말만으로는 부족해 평일에도 휴가를 내고 산을 찾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가족들과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갈등보다 내가 먼저였다. 내가 살아야 했으니까.
가파른 오르막을 만날 때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다리가 무거워지고 이마에는 땀이 줄줄 흘렀지만,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한 걸음씩 오르다 마침내 눈앞이 탁 트이면, 힘들었던 순간은 어느새 뿌듯함으로 바뀌었다. 가끔 만나는 큰 바위를 타는 기분은 또 얼마나 신나던지. 산에 가는 날이면 그 힘든 순간마저 기다려졌다.
다음 목적지가 정해지면 코스부터 찾아보았다. 후미에서 숨 가쁘게 따라가기 바빴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새 앞서 올라가 일행을 기다리곤 했다. 서울을 벗어나 낯선 산에 오르는 일도 더는 망설여지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산이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갈 기세였다.
지금도 산을 향한 마음은 여전하다. 다만 예전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을 뿐이다. 그래도 매월 둘째 주 토요일이면 산행을 위해 이른 아침 집을 나선다.
이번 달 산행지는 대공원 둘레길이다. 정상에 오르는 코스와 달리 큰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코스는 제법 길지만 경사가 심하지 않아 천천히 걸으며 주변 풍경을 즐기기에 좋다.
앞사람의 발걸음에 맞춰 천천히 걷는다. 길가에 핀 꽃도 눈에 들어오고,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도 반갑다. 쉬운 코스지만 오랜만에 나온 친구에게는 이 길도 숨이 차다. 반면 매월 빠지지 않고 산을 찾는 친구는 양팔을 들어 올리고 엉덩이를 흔들며 춤추듯 가볍게 걷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우스워서 우리 모두 깔깔깔 웃는다. 예전 같으면 쉬지 않고 지나쳤을 풍경 앞에서 잠시 걸음을 늦춘다. 정상을 향해 서둘러 오르던 때와는 다른 여유가 생겼다. 이제는 얼마나 높이 올라왔는지보다 길 위에서 마주하는 풍경과 친구들의 표정이 더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험한 산행보다 여유롭게 즐기는 산행을 택한다. 집에 돌아와 배낭을 내려놓으면 다리는 묵직하지만, 마음은 한결 가볍다. 다음 달에는 어느 산으로 갈까. 친구들과 함께 걸을 길을 떠올리다 보면 벌써 다음 산행이 기다려진다. 예전에는 정상에 오르는 성취감이 좋았다면, 이제는 친구들과 나란히 걷는 하루가 좋다.
산은 내게 나만의 속도로 걸어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제는 멀리 있는 정상만 바라보기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걷는 시간을 즐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