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르는 나의 공연

by지후트리


수어그림_소름.JPG수어 그림 < 소름 > / 지후트리 / 2018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마주하며 살아왔지만, 때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유형의 사람을 만난다.

요즘 들어 자주 생각하는 말이 있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방식의 실수가 반복된다면, 그것을 여전히 실수라고 불러야 할까.


올해 중순쯤, 한 팬에게 제보를 받았다.

“지후트리님, 이 공연 참여하시는 건가요?”

무슨 소리인가 싶어 확인해 봤더니 내가 알지도 못하는 공연의 홍보물에 내 사진이 사용되고 있었다.

출연을 약속한 적도, 사진 사용에 동의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그 공연의 홍보물에 등장하고 있는 걸까.

팬을 통해 전해 들은 축제 사무국의 설명은 더욱 황당했다.

사무국에서는 내가 해당 공연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다만 공연 하루 전까지도 참여 아티스트가 변경될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고 한다.

통화 당시까지는 내가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나의 공연이라니. 세상에는 참 희한한 일이 많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고, 그다음에는 불쾌했다.

무엇보다 내 이름과 얼굴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 나빴다.

나는 초상 사용 문제와 내가 창작한 수어 안무의 사용 중단을 요청하는 내용증명을 보냈다.

돌아온 첫 반응은 짧았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취지의 설명과 사과처럼 들리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뒤, 상대방의 태도가 달라졌다.

수어 안무에 대한 사용료를 이미 지급했으니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수어는 언어이기 때문에 사용해도 상관없다는 취지의 설명도 이어졌다.

새로운 수어통역사를 섭외해 공연을 진행하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수어가 언어라는 사실을 내가 모를 리 없다.

나는 그 언어를 배우고, 관찰하고, 연구하며 나만의 시각예술로 확장해 온 사람이다.

하지만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언어를 재료 삼아 하나의 창작물을 만드는 것은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나 몸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안무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말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희곡이 저절로 쓰이는 것도 아니다.

수어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맡았던 일은 단순히 정해진 수어 동작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공연자가 무대 위에서 어떤 동선으로 움직일지, 음악의 어느 지점에서 어떤 움직임을 보여줄지,

공연자의 신체와 표현 방식에 맞춰 수어 동작을 어떻게 새롭게 구성할지 고민했다.

관객에게 수어를 소개하고 직접 배워보게 하는 순서 역시 내가 구상한 공연의 일부였다.

나는 그 공연에 내 시간과 감각, 그리고 창작자로서의 판단을 쏟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뒤 돌아온 설명은 수어 안무에 대한 사용료를 이미 지불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문득 궁금해졌다.

돈을 지불했다는 사실은 창작자의 모든 기여를 지워도 된다는 뜻일까.

내가 만든 것은 단순히 몇 개의 손동작이 아니었다.

움직임이 이어지는 방식이었고, 무대 위에서 언어가 전달되는 구조였으며,

관객과 공연이 만나는 순간에 관한 설계였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을 하나의 사용료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창작의 가치를 너무 간단하게 계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욱 씁쓸했던 것은 이 모든 일이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벌어졌다는 점이었다.

예술가라면 자신의 작업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고민을 필요로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는지,

무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보이는 움직임 하나에도 얼마나 많은 선택이 숨어 있는지 말이다.

물론 예술가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작업 방식도 다르고, 예술을 대하는 태도도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의 창작을 존중하는 일은 취향이나 가치관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일까.


나는 결국 공연 당일 현장을 찾았다.

공연을 직접 보고 싶었다. 내가 참여하지 않는 공연이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었는지,

그동안 내가 고민했던 움직임과 구성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날 무대에서 수어를 표현하는 사람은 수어통역사였다.

그리고 공연 중간에는 관객에게 수어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고, 수어를 직접 알려주는 순서가 진행됐다.

내가 앞서 구상하고 제안했던 방식과 닮아 있었다.

물론 관객에게 수어를 소개하고 가르치는 형식 자체가 오직 나만의 창작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공연을 위해 내가 직접 고민하고 구성했던 흐름이,

나의 참여가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다는 사실은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공연을 보는 내내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참여하지 않는 무대에서 내가 고민했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이라니.

창작자가 빠져나간 자리에서 창작자의 흔적은 누구의 것이 되는 걸까.


나는 수어라는 시각언어를 기반으로 그림을 그리고, 몸을 움직이고, 공연을 만든다.

하나의 수어 단어를 알게 되면 그 단어가 탄생한 배경과 움직임의 의미를 살펴본다.

손의 모양과 방향, 움직임의 흐름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찾는다.

나에게 수어는 단순히 손으로 전달하는 정보가 아니다.

언어이면서 동시에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감각을 확장해 주는 매개체다.

그래서 수어가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는 일은 언제나 반갑다.

누군가 내 작업을 보고 수어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있을까.


그러나 수어를 널리 알리는 일과 수어를 활용해 창작한 사람의 기여를 존중하는 일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어가 모두의 것이라는 사실이 그 언어를 활용한 개별 창작자의 시간과 노력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닐 테니까.


나는 내 작업이 누군가에게 좋은 영감이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예술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확장되기도 한다.

나 역시 수많은 사람과 작품에서 영감을 얻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영감을 주고받는 일과 타인의 창작에 대한 존중을 생략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또다시 내 사진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전 공연에서 촬영된 사진이었다. 그 사진이 촬영된 공연과 지금 홍보되고 있는 공연은 별개의 일이었다. 과거에 함께 무대에 섰다는 사실이 앞으로의 공연 홍보에도 내 얼굴을 사용할 수 있다는 허락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순간 오래 전의 불쾌함이 다시 떠올랐다.

처음에는 실수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문제를 제기하고 사용 중단을 요청했던 일이 다시 반복되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실수라는 말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나는 거창한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내 이름을 사용하기 전에 묻는 것.

내 얼굴을 사용하기 전에 허락을 구하는 것.

내가 만든 작업을 활용하고 싶다면 그 범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문제가 생겼다면 그 사실을 인정하고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그 정도의 존중이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살아가다 보면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마련이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같은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예술가의 시간과 노동이 얼마나 소중한지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 기대가 지나쳤던 걸까.


예술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한 걸까.

자신의 예술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예술가의 작업과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모순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나는 여전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다만 이번 일을 겪으며 한 가지는 조금 더 분명해졌다.

좋은 예술을 이야기하는 것과 좋은 예술가로 살아가는 것은 반드시 같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글 지후트리 ghootree

그림 지후트리 ghoo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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