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여동생의 남편 케니와 통화를 했다. 폐암으로 치료를 받고 있던 때였다.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애써 밝게 말해주었다. 몸이 좋아지면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도 나눴다. 그때만 해도 정말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치료하고 있다기에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마지막 통화가 될 줄은 몰랐다.
지난 8월 25일, 여동생의 남편이자 나의 제부인 케니 카포가 세상을 떠났다. 올해 예순두 살이었다. 소식을 듣고도 한동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목소리를 들었던 사람이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97년, 여동생은 서울에서 인도인 선교사 케니와 결혼했다. 당시 부모님은 딸의 결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른 이유도 아니었다. 사위가 인도 사람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결국 부모님은 딸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마음 아픈 일이다.
처음 만났을 때 케니는 한국말이 서툴렀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주고받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열심히 한국말을 배웠고,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부모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말보다 그의 행동이었던 것 같다. 한국에 올 때마다 함께 식사를 하고 나면 그냥 앉아 있으라고 해도 벌떡 일어나 설거지를 했다. 집안일이 보이면 먼저 손을 보탰고, 연로해진 부모님의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드리기도 했다. 그런 시간이 하나둘 쌓이면서 부모님도 마음을 열었다. 결혼식에도 가지 않았던 두 분이었지만, 자신들에게 진심을 다하는 케니를 지켜보면서 어느새 그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제 부모님 두 분도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다. 케니의 소식을 듣고 문득 두 분이 지금 살아계셨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곤 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위가 예순둘이라는 이른 나이에 먼저 떠났다는 사실을 아셨다면 두 분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어느 순간부터 우리에게도 케니는 더 이상 인도 사람이나 외국인 사위가 아니었다. 그냥 우리 가족 케니였다.
결혼 후 여동생은 남편이자 선교 동역자인 케니와 한국과 인도를 오가며 생활했다.
2006년부터 두 사람은 인도 나갈랜드에서 청년 캠프를 열었다. 술과 마약, 좋지 않은 습관에 빠져 있던 젊은이들이 이전의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낯선 땅에서 그 일을 이어가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두 사람은 나갈랜드 디마푸르에서 M.I 선교센터와 신학대학원, 기술센터를 함께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오래전 어머니와 함께 인도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본 두 사람은 늘 바빴다. 교회 일을 하고,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만났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분주하게 살아가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 모습을 직접 보고도 당시에는 두 사람이 그곳에서 감당하고 있던 삶의 무게를 다 알지 못했던 것 같다.
훗날 여동생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선교의 시간을 담아 《인도 나갈랜드 선교이야기》라는 바카라을 펴냈다. 나는 그 바카라을 읽으면서 비로소 내가 알지 못했던 동생 부부의 삶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어떤 대목에서는 한참 바카라장을 넘기지 못하고 목이 메기도 했다.
나 역시 오래전 어머니와 함께 다녀온 인도를 떠올리며 서랍 속에 묻어두었던 사진과 기억을 꺼냈다. 그렇게 쓴 글을 온라인카지노북 《서랍 속, 다시 꺼내 본 인도》로 묶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늘 두 사람이 함께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 풍경에서 케니 한 사람만 사라졌다는 것이 잘 상상되지 않는다.
케니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뒤 인도에서는 곧바로 장례 준비가 시작됐다.
인도에서는 보통 장례를 하루 만에 치른다고 한다. 하지만 케니의 죽음이 워낙 갑작스러웠고 준비해야 할 일도 많아 이틀에 걸쳐 장례가 치러졌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그 먼 곳까지 갈 수 없었다. 다행히 인도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남동생만이 우리 가족을 대표해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남동생이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관 위에는 흰 꽃이 놓여 있었고, 흰 예복을 입은 목회자들이 관을 둘러싸고 있었다. 케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고 했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제야 조금씩 실감이 나는 듯했다. 정말 떠났구나.
불과 얼마 전까지 목소리를 들었던 사람이 이제 다시는 목소리도 들을 수 없고, 볼 수도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리고 자꾸 여동생 생각이 났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는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찾아오는 많은 사람을 맞고 장례 절차를 치르느라 자신의 슬픔을 들여다볼 틈조차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지금부터가 더 힘들지 않을까. 오랜 세월 남편이자 동역자로 함께했던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서 동생은 다시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 많은 일들을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갈지 걱정이 앞선다.
언니인 나는 그 막막함을 짐작할 뿐이다. 당장 곁으로 달려가 줄 수도 없고, 동생이 짊어져야 할 몫을 대신 들어줄 수도 없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요 며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무언가를 하다가도 문득 생각이 멈추고, 글을 쓰려고 앉아도 한 줄을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이렇게라도 케니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본다. 마음이 허공에 떠다니는 듯하다. 어쩌면 정리되지 않아서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달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던 케니의 목소리가 자꾸 생각난다. 힘이 없으면서도 내게는 애써 밝게 말하던 목소리였다.
"다시 봐요."
그때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러자고 했다. 정말 다시 만날 날이 있을 줄 알았으니까.
긴 시간을 함께하며 어느새 우리 가족이 된 사람. 가족이 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이별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