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이 음악을 듣겠습니다

냉정과 열정 사이

by이수 E Soo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날씨 앱을 켰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비가 온다는 예보.

일주일 내내 비라니. 주말까지 아직 5일이나 남았는데, 마음에도 비가 내리는 듯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바깥이 캄캄하다. 잿빛 하늘에 안개까지 자욱해서 창밖을 봐도 멀리 보이지 않는다.

일단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어느 심리학자의 글에서 아침에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작은 습관에 대해 읽은 뒤로 아침마다 이불을 갠다. 사실하기 싫은 날도 많다. 그래도 다 해놓고 나면 ‘오늘도 일단 하나는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음악을 틀었다.

스포티파이가 추천해 준 데이 음악에서 요즘 내가 자주 듣는 영화음악 [냉정과 열정 사이]이 흘러나온다. [냉정과 열정 사이] OST 중에서 [Keep Your Fingers Crossed]를 좋아한다. 남자 배우는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여자 배우는 영어로 말한다. 그 둘 사이로 낮은 첼로 소리가 흐른다.

이 곡은 오래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나는 원래 한 번 마음에 들면 꽤 오래가는 편이다.

한국에서는 등산과 피트니스를 했고, 캐나다에 온 뒤에는 산이 없는 도시에 살면서 대신 오랫동안 요가를 했다. 작년부터는 수영을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음악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 곡에 꽂히면 질릴 때까지 반복해서 듣는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듣고, 회사에서도 듣고, 잠들기 전에도 듣는다. 며칠 동안 같은 곡을 반복해서 듣고도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주변 사람이 먼저 질릴 가능성이 높다.

내가 음악을 자주 틀어놓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조용하면 생각이 많아진다. 해야 할 일이 떠오르고, 지나간 시간 속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람들과의 안녕이 생각나기도 한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도 하나둘 따라온다.

그래서 음악을 틀어놓는다.

흩어지던 생각을 잠시 음악에 맡겨두려고. 음악을 듣고 있는 동안만큼은 그 생각들을 내려놓을 수 있으니까.


가사가 있는 발라드는 잘 듣지 않는다.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노래가 내 이야기가 된다. 발라드 가사는 왜 비슷한 곳을 자꾸 건드릴까. 그러면 곤란하다. 아침부터 음악 한 곡 듣다가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커피도 마시지 않았는데 과거까지 다녀올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직 마음에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떠오르면 ‘왜’라는 질문까지 따라온다. 그 질문은 한 번 시작되면 끝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그런 음악은 듣지 않기로 했다.

대신 가사가 없는 영화음악이나 클래식을 듣는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가사가 들리면 머릿속에서 막 나오려던 문장이 멈춘다. 내가 쓰려던 문장보다 노래의 문장을 따라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쓸 때는 가사 없는 음악을 틀어놓는다.

그러면 마음이 조금 잔잔해진다.

잔잔한 바다에 몸을 맡기고 둥둥 떠서 스노클링을 할 때처럼. 파도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굳이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수면 아래를 바라보며 가만히 떠 있으면 된다. 내 마음도 잠시 그런 상태인 것 같다.


비가 내리는 오늘 그리고 내일은 어떤 기분으로 하루를 살아갈까.

매일 마음이 맑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날씨처럼 마음도 흐린 날이 있고, 별일 없이 가라앉는 날도 있을 테니까.

날씨가 흐리다고 내 마음까지 흐리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흐린 마음을 억지로 맑게 만들고 싶지도 않다.

그냥 오늘은 이런 날인가 보다 하고 지나가면 된다.

회색빛도 나고, 오렌지빛도 나니까. 그저 오늘은 회색빛에 가까운 날일 뿐이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나는 밝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서서 다시 음악을 튼다.

[Keep Your Fingers Crossed]

아마 한동안은 이 음악에 빠져 있을 듯하다.

질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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