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둘 핫둘, 영차영차” 횡단 보도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여인을 응원했다.
“언니, 오늘 하루 에너지 30 프로는 다 써버린 듯해요.”라며 숨을 헐떡거린다.
“그런데, 왜 그동안 안 보이셨어요? 오랜만이에요. 괜찮으신 거죠? 저는 언니가 아픈 줄 알았어요.” “아니야 내가 아픈 게 아니라, 큰딸 삼 남매가 독감에 걸려서 딸이 돌봄 휴가를 냈어.”
“그러셨구나. 혹시나 언니가 아픈 줄 알고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몰라요.”
“궁금할 것 같아서 우리가 만나는 7시에 내려가 말해 줄까? 그런 생각도 한 적 있었지.”
작년 말부터 우리는 똑같은 시간대에 엘리베이터 타는 빈도가 잦았고 그동안 정이 들었다.
예전부터 인사를 잘하고 낯꽃(활짝 웃는 모습)이 좋아 마음에 들었던 이웃! 나는 제일 꼭대기 층에 살고
그녀는 중간층에서 탄다. 승강기 안에선 눈인사만 하고 내리자마자 숨이 가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우리가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시간은 딱 10분!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가는 동안 꽤 밀도 있는 대화가 오고 간다. 처음엔 그녀가 향하는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갔다. 그 후 그는 내가 가는 방향으로 틀어서 역으로 향한다. 일종의 배려다. 한동안 매일 만났는데, 이상하게 이번 주엔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출근길에만 만나서 서로 연락처나 이름은 모른다. 어느 날 자기도 은퇴가 가까워졌다고 해서 물어보니 나하고 띠동갑이었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과 무역회사에 다닌다는 정도다.
몇십 년을 대중교통으로 출근한 온라인 게임인의 발걸음은 빨라서 쫓아가기 힘들지만, 애써 태연한 척 보폭을 넓힌다. 우리의 10분간의 동행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요즘 사람들 나이는 가늠할 수 없다. 가끔은 ‘그렇게 정직하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말할 정도로 태도 옷매무새 몸매도 지적이고 젊다.
그녀 역시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젊을 때부터 시작한 테니스를 지금도 하고, 온라인 게임에 다니면서 주말마다 테니스 레슨을 받는다고 해서 더 놀랐다. 나도 학교 가듯 매일 실내 골프장에 가서 연습한다. 우리는 이렇게 글쓰기와 운동이라는 공통점을 하나씩 발견하기 시작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을 알아가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아침마다 그녀의 밝은 미소를 기대하고 10분간 함께하며 에너지를 얻는다. 다정하게 마음을 나누고 싶은 애틋함에 어떨 땐 말을 아끼고 더 오랫동안 걸을 수 있기를 바란다.
느긋하게 서로 알아 가는 것. 각자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손주들 등원시키고 딸과 바통 터치해야 해서 서둘러 가야 한다.
그녀도 출근길이니 느긋하게 얘기할 수 없어 미련이 남는다. 정확한 이름도 연락 번호도 모르지만, 그녀를 만나면 생기가 돋고 대화가 술술 터져 케미가 맞는 듯하다.
이상하게 지난주에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두 대의 엘리베이터가 다니기 때문에 어느 날은 지하 1층에서 기다렸다. 내가 아는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출발하는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문이 활짝 열리자 까꿍이라고 말할 뻔했다. 기다리는 동생은 보이지 않았고 웬 남자가 내렸다. 까꿍 했으면 어쩔 뻔, 표현하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바쁜 마음에 그 장소를 떠났지만, ‘다음 것을 타고 내려오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계속 뒤를 돌아다봤다.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출근 동행자가 되면서 알고 싶고 많이 기다려진다.
같은 시간대에 짧은 출근길을 함께 걸어가면서 나누던 말들이 떠오른다. 요즘같이 삭막한 아파트에서 시간과 공간을 함께 나누지 못하면 친구 만들기도 어렵다. 나이 온라인 게임 사는 곳, 지연 학연에 따라 친구를 사귀는 모습도 다양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같은 시간대에 출근하며 몇 마디 나눈다는 이유로 기다리는 존재가 되었다.
예기치 않은 만남으로 이어진 인연이 갈수록 더 궁금해지고 어디서 만나도 반가운 얼굴로 인사할 것 같다. 그녀의 말하는 태도와 건강하게 전달하는 방식이 예뻐서일까.
예전에는 똑같은 시간에 만났는데 요즘은 왜 만나지 못할까? 10분간의 출근 동행이 달콤한 향연처럼 그리워진다. 젊은 남녀 간에 호감이 있다는 신호, 그린 라이트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7시 알람과 동시에 벌떡 일어난다. 아마도 그녀의 밝은 기운이 나를 일으켜 세우는 듯하다. 며칠 후 그녀는 테니스 라켓을 들고 나타났다. 회사 동아리에서 수요일은 운동하는 날이란다. 라켓을 움켜쥔 그녀의 손이 유난히 다부져 보였다. “아유 멋지겠네. 땀을 뻘뻘 흘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상기된 모습이 그려지는데…”
그녀는 말했다. “테니스는 ‘이기적인 운동’이라서 초보자보다는 실력이 좋은 사람과 뻥뻥 치고 싶은 마음이에요. 어느 날부턴가 신입 사원을 접대하는 느낌이 들어서 힘들어요.”
골프도 마찬가지다. 초보자와 함께 4~ 5시간 라운딩한다는 것은 좀 힘들다. 골프도 잘하고 매나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라운딩하고 싶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라운딩했던 초보자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그런 시절 없이는 지금 편안하게 운동할 수 없다. 서로 협력하고 배려하고 묵묵히 함께하는 것이 동반자의 역할이다.
사람은 각자 나름 고유의 분위기가 있다. 뒤태 발걸음 옷매무새와 말투까지. 딩동, 그녀가 사는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면 숨을 깊게 들이쉬며 잔뜩 기대하고 마중할 준비를 한다.
이렇게 시간을 딱 맞춰 신나게 이야기하고 헤어질 때 그녀는 말한다. “우리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 해요.” 그럴 땐 영락없이 오래된 친구 사이 같다.
오늘도 반갑게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발그레한 복숭앗빛 닮은 얼굴을 내밀며 까꿍 하는데 정말 정겹다. 그녀의 미소는 산소 같다. “이제 출근 시간에 만나지 않으면 이상한 것 같아요.”
이렇게 아침 10분간의 수다로 하루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의식을 치른 후, 각자 삶의 현장으로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는 우리! 그렇게 서로의 생체 리듬을 맞춰 간다.
그런데 요즘 고민이 생겼다. 아침마다 출근길 동행자를 만나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은 가벼운 대화로 무거운 마음을 털어 버릴 수 있어 좋다. 하지만 나의 본분인 손주 돌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조금 일찍 딸 집에 도착하면 출근 준비로 분주한 딸이 조금 더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겠구나!
누군가를 만날 욕심에 너무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나? 정작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잊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 생각에 가슴이 뜨끔했다.
지난주부터 조금 서둘러 집을 나섰다. 덕분에 딸은 훨씬 편안한 얼굴로 출근 준비한 것 같아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달콤한 그녀와의 10분간의 출근길 동행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아쉽다. 하지만 삶은 늘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쥘 수 없는 법이다. 매일 꼭 만나지 않아도 가끔 우연히 마주치는 반가움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내가 아는 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녀의 밝은 얼굴이 나타나는 날이면, 우리는 여전히 반갑게 웃으며 걷는다. 짧은 10분이지만 서로의 하루를 응원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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