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새벽 완행열차를 탔다. 숲 해설 동기 여덟 명과 무궁화호로 함께한다. 천사백 년 된 주목을 찾아가는 길. 까마득한 과거의 시간까지 품은 노목을 느린 발걸음으로 찾기 위해서다. 취미가 같아서일까. 오랜 시간 함께 하지만 늘 반갑고 고마운 벗들이다. 여름을 지나가는 태양에 숨죽인 나무들은 고개 숙이고 있다. 얼마 전 장맛비 덕분에 한 뼘씩 더 자랐다. 차창가로 보이는 초록색 잎사귀가 내뿜는 풀내음이 유리창을 노크한다. 나는 숲속에 시선을 던진 채 끝없이 이어진 싱그러운 향내와 함께 여행한다. 빠름보다 느림을 선택한 여행객들은 간혹 멈춰 선 열차에도 조급해 하지 않는다.
조그마한 역사, 사북역에서 내린다. 어릴 적 고향에서 보던 역이다. 이정표가 없고 안내도 없는 시골역이 정감이 갔다. 작은 대합실에는 에어컨이 시원하게 켜져 있고 tv에서는 월드컵 중계가 열광적으로 흘러나왔다. 축구 경기는 지구 전체를 하나로 이어주는 듯했다. 과거와 현재를 하나로 품은 주목이 이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랑스러운 정선 사북이다.
정선카지노 옆 산바카라로를 걷다 휴양림에 도착하자 여름이 비껴간 것 같다. 깊숙한 숲속이지만 벌레도 없다. 저녁 먹고 밖으로 나오니 계곡 물소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란 걸 알려준다. 밤하늘엔 별이 총총하다. 시원한 바람이 은은하게 비추는 가로등 불빛을 가른다. 여름밤의 흐릿한 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온통 숲으로 둘러싸인 이곳의 밤은 세상의 모든 비밀을 품고 서서히 흘러간다, 우리들의 긴 이야기와 함께.
천사백 년 된 주목, 우리나라 생물 중 가장 오래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긴 세월 동안 한자리에 서 있는 주목을 만난다는 생각에 이른 아침부터 서두른다. 도사곡휴양림에서 3.5km라는 안내판을 보고 주변 나무를 살피며 느린 걸음으로 오른다. 아직 부드러운 박명(薄明)이 가득 차 있는 숲속으로 들어간다. 푹신거리는 등산길은 쌓여 있는 낙엽으로 여름을 잠시 잊게 한다. 키 큰 나무들의 경쟁으로 좁은 길 위 하늘은 초록으로 덮여있다. 빽빽한 나무 사이를 간혹 바람이 길을 내준다. 천년 세월이 흐른 계곡물 소리는 우렁차다. 옹달샘터에는 피막이와 초록 이끼가 바위를 온통 덮고 있어 신의 세계로 점점 들어선 느낌이다.
바닥에는 멸가치가 유난히 많아 보인다. 물푸레나무 열매가 까만 길 위에 연둣빛으로 누워 안내한다. 이름 모를 하얀 작은 버섯은 길 따라 쭉 이어져 밤이 되면 신비로운 불빛으로 보일 것 같다. 활엽수가 많은 숲은 울창하지만 오래된 나무는 없어 보인다. 인적 없는 숲속은 나뭇잎 스치는 소리에도 정령이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이곳은 나무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비밀을 품은 작은 생명들이 숨 쉬고 있다. 투구꽃, 진범, 박새 등 독초가 유독 많은 건 죄지은 모든 것들은 올라오지 말라는 뜻일까. 길 따라 세 시간 정도 오르자 계곡 물소리가 멈추고, 하얀 구름이 하늘에서 춤추는 모습이 보인다.
해발 1,100m의 탁 트인 언덕이 햇살에 반짝거린다.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운 공기가 온몸의 기운을 굳게 만든다. 주목 세 그루가 위아래로 나란히 보인다. 저절로 고개 숙여 인사한다. 세 나무를 감싼 주변은 작은 나무들이 시중들고 있다. 고구려시대부터 살아온 주목이 사람의 도움 없이 높은 산 위에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름다운 수형의 싱싱한 줄기에는 잎이 파릇파릇 달려있다. 천연기념물 제433호인데 관리가 허술해 보였다. 이런 귀중한 나무에 카메라가 안 보이고, 철바카라 하나 없이 노출되었다는 것이 의아했다. 지금까지는 자연이 서로를 보호하고 있는데 인간이 훼손할까 걱정스럽다.
오랜 세월 거목을 감싸안은 땅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기고, 주변공기는 영험한 기운이 서려 있는 듯 거룩한 분위기에 압도된다. 상목과 하목은 1,200년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중목은 생장추 검사 결과 1,400년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공인됐지만 속이 비어 보호재가 칠해 있다. 둘레가 470cm인 줄기가 서로 휘어 감고 기울어져 세심한 관리가 필요해 보였다. 줄자로 측정해 보니 상목은 377cm, 하목은 420cm다. 높이는 측정하기 어려워 하늘만 쳐다본다. 어울리지 않게 혼자 서 있던 중목 위의 전나무는 고사 되고 있었다.
상목
중목, 전나무
하목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한 칸 한 칸 나이테를 쌓으며 1,400년을 살아온 주목, 혼자 힘으로 그 긴 세월을 살았을까. 수많은 자연재해가 비껴갔고, 누군가의 힘이 버팀목이 돼줬겠지. 세상 어수선함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뿌리 내린 거목을 보며 인간의 유한함을 생각한다. 그들은 지구 변화를 하나하나 나이테에 기록하며 인간에게 과거를 말해준다. 세 그루가 서로 의지하며 견뎌왔기에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았을까. 강인한 뿌리로 대지를 움켜쥐고 서로를 바라보며 지내왔겠지. 1,400년을 버틴 힘은 신의 보호 덕분일까.
내가 짊어진 삶의 고뇌와 번뇌는 한낱 부질없는 미미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내려오는 길,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뒤로하고 “이번 생에서는 안녕,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나요.”라고 인사했다. 나의 하루는 이 거목에겐 찰나일지 모른다. 묵묵한 인내로 그들을 닮아가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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