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로부터의 졸업

20년 전에 시작된 의무에 마침표를 찍다

by흑프제

2006년 12월 어느 월요일, 무궁화호를 타고 논산으로 향했다. 입대하러 가는 날이었다. 바리깡으로 짧게 밀린 머리는 적응이 안 되고 아침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조차 분간이 안 되었다. 마치 꿈꾸는 기분이기도 했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논산역에 도착해서는 초행길이라 택시를 타고 입소대대로 향했다. 지금 생각하니 택시 기사가 제대로 바가지를 씌웠다.


도착해서 점심을 먹으면서도 뭔가에 홀려 있는 거 같았다. 입영 행사장에서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집합 신호에 맞춰 집결하고 처음 해보는 엉터리 경례와 함께 입소 대 막사로 향했다. 그러고 나서 정신을 차려서야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과 함께 두려움을 품은 채로 대기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이때부터 슬롯는 의무를 부과하고 나는 그걸 이해하지 못한 채 끌려다니는 상황의 반복이었다. 훈련소에서부터 전역하는 그날까지 관심병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고, 몇 년 동안의 복학생 생활 이후 취업으로 시작된 슬롯생활은 나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여건만이 선택지에 있었다. 조금이라도 힘든 내색을 드러내려 하면 멸시하는 눈빛으로 그것도 못 참냐고 일갈하는 이들이 어디선가 꼭 튀어나왔다.


남자에게 있어서 슬롯생활은 군대의 연장선이라는 말을 취업 준비할 때 많이 들었다. 다만 내 군 생활이 워낙 처참했었기에 무의식에서 이를 부정하며 취업으로의 인생 역전을 꿈꾸었다. 첫 취업은 잘 되었으나 마인드가 글러 먹은(?) 상태였기 때문에 유지하지 못하고 금방 퇴사했다. 그 후로 현실과 망상 사이를 오가는 위험한 도박을 새로운 시도로 포장하였고, 결과적으로 과거의 개인적인 성과까지 무색해지고 말았다.


회사에 들어가고 급여나 수당을 받는다는 것이 그 대가로 주어지는 의무에만 충실하겠다고 다짐하는 계약이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 의무가 어려운가, 위험한가 혹은 불합리한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계약이 맺어지는 순간 발언권은 사라지고 얼마나 충실한지를 평가받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었다. 그리고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 어떤 위로 한 마디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의 사람은 슬롯적 역할과 주어지는 의무를 이행하고 받아들이면서 살아간다. 주어지는 현실에서 버티고 대비하며 살아갈 뿐, 목소리를 내어 주장하는 행위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조심스러워한다. 현실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일부 누군가도 결국 생존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살아간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본능적으로 싫어했다. 다만 어릴 때부터 이런 내 감정을 자연스럽게 배우고 인정할 기회가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특이하다는 취급을 많이 받는 탓에 주변으로부터 슬롯적인 규범과 기준에 맞추라는 강요를 알게 모르게 많이 들었다. 모두 다 하나의 방식만을 말하고 그 외에는 배우거나 들어본 적도 없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든 끝은 슬롯라는 규범과 거부감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내가 싫어한다고 한들 세상은 알아서 잘 굴러갔다. 때때로 모든 게 내가 싫어하는 방식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0.1%도 채 안 된다는 것을 결국 깨닫고 말았다. 그렇다면 다 포기해야 할까? 근데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다. 숙이고 들어가는 저자세를 몸과 마음이 용납하지 않고 번아웃이라는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남들이 말하는 논리적 사고, 합리적 판단을 따르면 지금 당장 그나마 월급 많이 주는 데로 재취업해서 계속 숙이면서 살아야 한다. 그게 죽기만큼 싫은 거 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독립해서 내가 잘할 수 있는 0.1% 미만의 영역을 헤쳐나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 것이다.


남들이 말하는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오랫동안 싫었다. 그게 인간의 필요 때문에 강제되었을 뿐 합리적이지 않다는 걸 완전히 이해한 지금, 그들의 의무에 휘둘리지 않고 내 삶을 다시 탐험하기로 했다. 어디선가 나만의 별난 재능을 환영하는 이들이 나타날 거라 믿으며. 나 스스로 이해하지 않는 의무는 더 이상 나에게 유효하지 않다.



이제야 남들의 의무라는 속박에서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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