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고 찐득한 고추장 양념이 싫어요.
떡볶이의 색감은 가히 폭력적이다.
'XX RED'라고 콕 찍어 말할 수 없는 독특한 붉은빛.
떡볶이의 색은 그저 '떡볶이 RED'이외의 말로는 표현이 안 된다.
올리고당이나 물엿이 고추장과 설탕, 마늘 등을 만나서 만들어내는 그 윤기 자르르한 붉은 빛깔은, 떡볶이를 먹지 않는 나에게도 강렬한 유혹의 컬러다.
플레이팅은 또 어떤가?
발그레한 떡들이 어묵과 한데 섞여 접시 위에 올려진 모습은 매력적인 무질서 그 자체다.
덤으로 올려지는 완숙 계란과, 조금 과하다 싶은 통깨 고명.
인정 많은 주인이 있는 가게라면 대각선으로 잘린 김말이나 야끼만두가 덤으로 올려져 있기도 한다.
비록 떡볶이를 먹지 않지만, 먹음직스럽게 담겨진 떡볶이 그릇의 플레이팅을 아주 좋아한다.
말 그대로의 눈호강이다.
내 입으로 들어갈 음식이 아니지만, 초딩 입맛, 아니 지극히 평범한 한국인 입맛을 가진 남편을 위해 떡볶이를 내놓을 때면, 일부러 어릴 적 분식집에서 보았던 초록색 접시에 담아 나름의 멋을 부리곤한다.
여기까지가 떡볶이에 대한 내 최선의 찬사다.
소화력이 약한 나는 쫀득한 식감의 떡을 소화시키는데 애를 먹는다.
더군다나 단맛과 매운맛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데, 떡볶이의 주된 양념인 고추장은 단맛과 매운맛이 섞인 결정체이니, 떡볶이라는 음식이 내 최대 기피 음식일 수밖에 없다.
예전 지인 중 누군가는 '밀떡은 괜찮을 거야.'라는 말을 했었다.
밀이건 쌀이건 버무려지는 양념이 고추장이니 말 다했지..
고추장을 빼고 간장을 넣어 만든 궁중 떡볶이도 결국은 '떡'이라는 교집합이 있으니 소용없다.
초등학교 앞 분식집 포장마차 골목을 지날 때마다 아빠가 사 주셨던 떡볶이.
당신의 딸이 떡볶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셨던 아빠는, 떡볶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전제와, 금쪽같은 장남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이유로 단골집을 지정해 두시고 우리를 앞장 세우시곤 하셨다.
부자의 입으로 연신 직행하던 떡볶이 그릇이 비워질동안 나는, 설탕에 굴린 꽈배기와 어묵꼬치만 깨작거릴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 촌스럽던 고교시절.
조잘대는 친구들과 토요일 보충수업을 마치고 나면, 아파트 사잇길을 지나 어김없이 떡볶이집으로 향하곤 했다.
아빠와 함께 먹던 떡볶이보다 더 괴로운 '신당동 떡볶이' 스타일의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길이었는데, 그나마 좋아하던 '떡볶이 RED' 빛깔을 찾아볼 수 없는 희끄무레한 그것을 마주하는 것이 여간 고역이었다.
친구들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한 젓가락 집어 들면, 여지없이 딸려오던 하얗고 굵직한 양배추까지 더해져, 신발 콧등 위로 식욕이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점잖은 김밥과 어묵탕이 없었다면 억겁 같던 그 시간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 정말. 떡볶이 좀 그만 먹으러 가자.
하지만 4:1의 일방적인 몰표를 이길 수가 없어, 나의 고교 3년은 떡볶이로 버무려진 기억만 가득하다.
대학생활을 시작하니 패밀리 레스토랑의 유행으로 동기들과 떡볶이를 먹으러 가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술집에서 시켜 먹는 안주 이외에는 굳이 떡볶이를 먹으러 찾아가지 않아도 되니 어찌나 마음이 편하던지..
그 시절에는 '봉추 찜닭'과 '홍초 불닭', '백순대', '이삭토스트', '장우동' 같은 음식들이 '베니건스', '아웃백', '애슐리' 같은 패밀리 레스토랑들과 맛대결을 치르던 때 였기에, 주전부리와 식사 메뉴의 선택의 폭이 넓었던 황금기였지 싶다.
그 좋았던 시절을 지나 취직을 하니 이건 웬걸.
야근을 밥 먹듯 하는 섬유 회사에서 대부분의 사수들이 떡볶이를 시켜댔다.
슬롯 초년생 막내에게 음식에 대한 선택권이 있을 리 만무했고, 먹지도 않는 떡볶이를 주문하거나 픽업해서 탕비실에 세팅까지 해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일도 힘든데, 밥심에 진심인 내 앞에 놓인 대용량 떡볶이통들을 볼 때마다 어찌나 성질이 나던지.
여초회사에서 떡볶이에까지 치여서 정신이 몽롱했던 시절이었다.
이후 과테말라에서 온라인 게임을 다니며 자연스레 떡볶이와의 인연을 끊어냈다.
1년에 몇 번, 남편을 위해 만들어주는 '차돌박이 떡볶이'를 제외하면 붉은 고추장 국물을 내 집 부엌에서 만날 일은 없다.
당신이 떡볶이 안 좋아해서
내가 다 먹을 수 있으니 좋아!
긍정적인 먹보 남편다운 발상이다.
그래.. 나는 안 먹어도 만들어 줄 수야 있지. 다 먹어...
4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
나이를 더 해 갈수록 어릴 적 안 먹던 음식들을 먹게 된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떡볶이는 내 입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더 나이를 든다 한 들,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떡볶이라는 국민음식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면 좋겠다.
세상에는 떡볶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떡볶이 시킬 때 다른 음식도 넉넉히 시키자.
아니 다른 음식 추가로 더 시킨다고 눈치 주지 말자.
'헤~~엑!!! 떡볶이 싫어하는 사람 처음 봐!'
그래..나도 반갑다..
#싫어할수도있지 #떡볶이 #많이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