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커플은 꼭 서로 한 사람만 만나야 할까? 다른 사람을 만나면 안 될까? 안 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모두 사랑의 대상을 독점하고 싶어 한다. 나만 봐. 다른 사람은 보면 안 돼. 말로 약속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더 확실히 하기 위한 여러 행동을 한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커플이라고 소개해서 독점 관계를 공식화한다. 두 사람의 감정이 충분히 성숙했으니 같이 살겠다고 약속하는 결혼식은 서로의 독점권을 슬롯적으로 인정하고 인정받는 예식이다. 평생 남편을, 아내를 사랑하겠습니까? 주례가 신랑 신부에게 묻는다. 평생 사랑하겠다는 성실 의무를 맹세해야 부부가 된다. 대답하지 않으면 주례는 성혼 선언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커플이 전자 팔찌를 나누어 찬다. 배반하면 경고음이 울릴 것이다.
그런데 죽을 때까지 일평생 사랑을 맹세할 수 있을까? 전자 팔찌의 경고음이 울리게 만드는 일은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감정이란 원래 약속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결심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자신도 왜 느끼는지 잘 모르는데, 어떻게 약속하는가? 노력하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대단히 불확실한 일이다.
서로를 독점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커플이 있었다. 거의 한 세기 전 일이다. 프랑스의 두 위대한 철학자인 시몬느 드 보부아르와 쟝-폴 사르트르였다. 한 사람은 페미니즘의 바이블인 『제2의성』을 발표해 여성이 독립된 주체로서 살게 해 준 인물이고, 다른 사람은 실존주의 이론으로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로부터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추앙을 받았던 인물이다. 왜 그렇게 결심했을까?
그들은 자유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다. 인간에게 어떤 정해진 본질은 없다.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서 주체가 되며 자신을 만들어 간다. 쓸 곳이 정해진 사물과 인간이 다른 존재인 것은 바로 이 자유 덕분이다. 자유는 인간의 존엄성을 구성하는 절대적 가치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유와 주체성을 포기하라고 강요할 수 없고 나 자신도 포기할 수 없다. 내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물건과 같은 존재가 되라고 요구할 수 없다.
20대에 만나 서로 깊은 사랑에 빠진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전통적 결혼을 거부하고 다른 형식의 커플이 되기로 합의했다. 동등한 관계로 독립적인 생활을 할 것이며 상대가 다른 파트너를 만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약속한 두 사람의 관계를 우리말로 ‘계약결혼’이라고 번역했다. ‘결혼’이라는 기존의 틀에 맞추려는 억지스러운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지켜야 할 의무사항만 서로 약속하고 동반자로 지내기로 결의했을 뿐이다.
철학적 신념을 실행에 옮긴 두 사람의 시도는 성공했을까? 다시 말해서 서로 구속하지 않고 각자가 자유롭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변함없는 관계를 유지했을까?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차례 위기의 순간을 넘으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50년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죽고 나서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나란히 잠들었다.
두 남녀 철학자가 각자가 자유롭게 만나고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기자, 배우, 작가, 문학 지망생 등등, 그들은 모두 두 철학자가 여전히 서로 만나고 편지를 주고받은 것을 보면서 견디지 못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두 사람 다 번번이 둘이 맺은 계약을 선택하고 돌아갔다. 일시적 사랑의 상대들은 상처받고 떠났다. 가장 강렬하게 감정을 소모하는 인간관계이며, 육체가 얽혀 들어 가장 흥미로운 인간관계인 연애에는 동지애나 형제애가 가진 관용이나 유연성이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두 사람을 평생 하나로 묶은 것일까? 일반적 연애와는 다른 특수한 유대가 있었다. “계약을 할 필요가 없다. 두 사람은 둘이 서로를 이해하는 만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르트르는 그렇게 말하며 덧붙였다. “우리의 사랑은 필연적인 것이지만, 우연적 사랑도 갖는 것이 적절하다.” 필연적? 둘 사이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절대적인, 떨어질 수 없는 사랑이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는 그와 대비되는 일시적인, 부차적인, 그러므로 헤어질 수 있는 사랑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철학적 사유와 문학적 창작을 공동으로 수행하면서 만들어진 정신적 유대가 그만큼 강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연적’ 사랑의 파트너와 만나는 경험을 서로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는 매우 이상한 성실 의무도 이러한 유대감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신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서로 숨김없이 털어놓기 어려웠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서로 이야기하지 않은 것들 혹은 이야기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느끼는 소유욕의 문제도 피할 수 없었다. 다른 파트너와의 사랑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알게 되면서 느끼는 질투와 고통은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보부아르의 문학 작품에는 둘 사이의 갈등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았다. 내 죽음이 다시 만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이다. 둘이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 화합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 아름답다.”
사르트르가 죽고 나서 보부아르가 했던 말이다. 죽음을 두고 어떤 환상도 허락하지 않는 금욕주의에 감탄이 나온다. 그처럼 이성적이고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본 둘의 관계가 아름답다고 했으니 동의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이상적인 인간관계를 찾고자 하는 두 철학자의 실험은 커플의 관계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다르게 살 가능성을 엿보게 한 것은 확실하다. 프랑스에서 볼 수 있는 ‘폴리아모리(다중사랑)’이나 ‘오픈관계’와 같은 현상이나 커플 사이에서 성실 여부를 협상하는 현상은 아마도 그들의 실험 덕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