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늙기 전에 세상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 자클린 장켈

by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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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후 스위스에 가서 죽으려고 한다.” 한 프랑스 여성이 자살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몇 년 전이다. 이름은 자클린 장켈, 나이 75세, 전직 영어 교수로 자식이 셋, 손자 넷을 두고 있는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었다. 젊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자살의 이유는 늙어서 였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들어보자.


75세부터 건강이 꺾인다.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고 도움을 받기 시작한다. 점차 병원 침대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고 결국 침대를 떠나지 못하고 마지막 시간을 기다린다. 그 삶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것이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처분을 결정하는 삶이다. 병원 침대에 묶여 튜브를 꼽고 호흡기를 달고 살다가 떠나고 싶지 않다. 배설물을 치워주고 목욕시켜 주기를 원하지 않는다. 살아오면서 할 만큼 했다.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자식들의 짐이 될 수 없다. 내가 원해서 세상에 오게 한 아이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다. 죽는 것보다 그것이 더 끔찍하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수만 년의 시간이 있었고 내가 죽고 나서 수만 년의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을 두려워해서 무엇하겠는가?


나이가 든 사람들은 많이 동의할 것 같다. 혼자서 해결해 왔던 행동을 남에게 보이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싫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식들을 물심양면 고생을 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 미안한 일이다. 내 몸을 최대한 잘 관리해서 그렇게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정신이 흐려지고 몸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을 느낄 때마다 심란하다. 언젠가 끝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끝에 닿기까지 장애와 질병으로 보낼 시간이 얼마나 길 것이며, 어떻게 보낼 것인지 너무 불확실하다. 자식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지만 조금씩 나빠지다가 악화되면 별 수 없이 짐이 될 것이다. 나만 괴로운 것이 아니고, 자식도 괴로울 것이다. 미안함조차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은 노년을 살아보지 않으셔서 그런지 인간의 노년을 너무 무성의하게 설계하신 것 같다. 나도 남도 힘들게 하지 말고 그냥 떠나게 해 주시지… 24시간 간병을 받고 있는 어머니 앞에서 가끔 혼잣말을 한다.


의미 없이 보이는 삶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적당한 시간에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죽음은 두렵지만 피할 수 없다. 부모, 친구, 가까운 사람과 작별하고 떠나는 것을 보아 왔다. 내 차례가 올 것이다. 나의 시간이 올 것이다. 내 의지에 따라 세상에 오지 않았지만 내 의지대로 세상을 떠나면 안 될까? 남은 시간이 즐거움 보다 고통이 더 많을 것이 확실할 때 실용적인 논리에서도 그만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자살은 죄가 아니다. 죽은 사람에게 죄를 물을 수도 없지만 실패해서 다시 살아났다고 해도 처벌하지 않는다. 치료해야 할 병으로 생각한다. 얼마나 힘들면 자살하려고 했을까? 그런 동정을 받는다. 그러나 자살을 도와주는 것은 범죄다. 우리나라에는 자살 방조죄(관여죄)가 있어서 최소 1년에서 최대 10년까지 징역을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도와줄 수 있게 하는 나라가 있다. 스위스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벨기에, 네덜란드, 캐나다도 있다. 조건이 아주 엄격하다. 불치병에 걸린 경우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는 막다른 상황이어야 하고, 정상적 정신 상태에서 본인이 원한다는 것을 표시해야 하고 등등 조건이 많다. “도와주는 것이 당사자에게 가장 좋은 일이다.” 상담 의사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나라에 따라 시행 방식이 약간 다르다. 스위스는 마지막 행동을 본인이 하게 한다. 스스로 가스 밸브를 열거나 약을 먹는다. 조력사다. 벨기에서는 의사가 시행한다. 약물로 30초 만에 잠들게 하고 2분 후 심장을 멈추게 한다. 안락사다. 프랑스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힘들게 외국에 가게 만드는 정부가 원망스럽다고 말하며 이웃 스위스나 벨기에로 가는 사례가 간간히 프랑스 언론에 소개된다. 지난 2월 관련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상원에서 거부되어 전망이 다시 불투명해졌다.


종교인들 앞에서는 말도 꺼낼 수 없다.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와 같은 유일신교는 자살을 단죄한다. 신이 주신 신성한 생명을 끊는 것은 신의 의지를 반하는 것이다. 그래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입장이 조금 다른 것으로 보인다. 존엄사를 허용하는 국가들은 모두 신교도들이다. 가톨릭 국가 프랑스에서는 법적 허용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불교는 자살을 살생의 한 종류로 본다. 다음 생에서 더 큰 고통을 만나게 된다고 경고한다. 대안으로 명상과 같이 스스로 극복할 정신력을 가질 것을 권장한다. 그러나 치매나 알츠하이머에 걸리면 정신력을 가질 수 없다. 게다가 정신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신체적 고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정신력이 아니라 약물로 극복하고 싶다.


철학은 좀 더 인간적인 여유를 준다. 고대 그리스 시대 철학자들은 자살에 관해 이후에 나타난 종교보다 너그러웠다.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는 그 점에 견해가 같았는데, 할 수 있다, 하면 안 된다, 둘 중 하나를 딱 잘라 결론 내려야 하는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가,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시간을 살고 있다면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자연이 준 가장 멋진 선물은 벌판으로 가는 열쇠를 주는 것이다. 도망가게 해주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의 구절이다. 자살을 열쇠를 열고 미지의 땅으로 도망간다고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갇혀 있던 집을 떠나 문을 열고 넓은 벌판으로 떠나는 모험으로 표상하다니 얼마나 멋있는 구절인가? 과연 철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게 해 준다.


몽테뉴의 후예 장켈은 자신이 예고한 시간보다 2년 늦게 2022년 파리 자신의 아파트에서 생을 마감했다. “두렵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라고 한다. 굳은 신념과 결단력을 가진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용기가 꺾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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