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색이 번지는 자리 1

by홍길동

두 색이 번지는 자리


 지난 명절의 기억이 빛바랜 수채화처럼 마음 한구석에 번져 온다. 그 풍경 속에는 팔순의 아버지와 갓 슬롯에 첫발을 내디딘 조카들이 마주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연신 조카들의 밥그릇을 채워 주셨고, 조카들은 어색한 듯 웃으며 그 손길을 받아냈다. 음식을 주고받으며 소소한 안부가 오가던, 잠시나마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화기애애하던 식탁의 공기는 거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탓에 일순간 굳어버렸다. 청년 주거 정바카라을 다루는 화면을 바라보는 조카들의 눈빛에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기어이 낮게 깔린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우린 평생 영끌해도 내 집 마련은 꿈도 못 꿔요…….'

 순간, 녀석의 말에 묘한 위화감이 일렁이며 내 마음의 결이 어지럽게 흐트러져 갔다...계속되는 조카들의 낮은 수군거림은 귓가에 맴돌았고, 어느덧 내 시선은 그 너머의 서늘한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윗세대의 고단했던 삶의 궤적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운 좋았던 구시대의 특권'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 고단했던 세월이 부정당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날이 선 목소리가 불쑥 새어 나오고 말았다. 잠잠히 듣고 계시던 아버지까지 요즘 젊은이들의 유약함을 탓하고 나서자, 따뜻했던 식탁의 공기는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사소한 시선의 어긋남이었을 뿐인데, 평화롭던 식탁 위로 차가운 균열이 소리 없이 번져 나갔다.

 식사가 끝난 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아파트 베란다로 나섰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붉은 석양과 차가운 푸른빛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아버지의 세월이 묵직한 붉은빛이라면, 조카들이 마주한 현실은 날 선 파란빛이었다. 두 색이 섞이지 못한 채 겉도는 모습이 마치 내 마음 같아, 그사이로 뿌연 회색빛 피로감만 겹쳐졌다.


다음 날, 그 잔상을 지우려 도심의 미술관을 찾았다. 전시장의 작품들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전시장 한가운데에 큼지막하게 걸린 현대 미술 작품 앞에서 나도 모르게 발길이 멈춰졌다. 캔버스 위에는 거친 질감의 붉은 물감과 서늘한 푸른 물감이 격렬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전날 식탁에서 마주했던 충돌과 닮아 한동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 보니 눈에 묘한 변화가 느껴졌다. 부딪치던 두 물감이 경계선에서 서로의 영역을 향해 무섭게 스며들더니, 이내 마술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활활 타오르던 붉은 물감 위로 푸른빛이 서서히 스며들어 뜨겁던 붉은 자리가 깊고 고요한 보랏빛으로 물들어갔고, 반대로 파란색 물감 중심부에는 붉은 온기가 들불처럼 번져나가며 선명한 자줏빛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집어삼키는 정복이 아니었다. 빨강이 파랑이 되고, 파랑이 빨강이 되는 완벽한 상생의 순간이었다. 화폭이 뿜어내는 그 고요한 기적 앞에서 나는 한참 동안 숨을 죽였다. 캔버스 위에서 소리 없이 이루어진 화합을 바라보는 동안, 가슴속에 얹혀 있던 회색빛 피로감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그제야 비로소 마음의 눈이 열리며, 전날 밤 차가운 균열이 갔던 우리 집 식탁이 거울처럼 투명하게 떠올랐다.

 그 기억의 잔상을 따라 전시장을 천천히 거닐며, 어제의 나를 정직하게 되짚어보았다. 나 역시 앞선 세대의 정당함만 내세우며, 조카들이 마주한 현실의 막막함을 가볍게 치부해 버린 것은 아니었던가. 서운함 뒤에 숨겨진 그들의 날 선 고단함을 보려 하지 않고 내 생각만을 주입하며, 갈등을 부추긴 미숙한 화가가 아니었던가......



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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