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와의 관계를 살리는 경계 설정의 지혜

by최환규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친밀함의 표시라 여겨 그냥 넘어갔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던 순간이 있다. 온라인 게임 상사의 가벼운 신체 접촉이나 성희롱성 농담이 거슬렸지만, 직급 차이 때문에 웃어넘겼던 경험 혹은 거절하지 못해 다른 사람의 부탁을 계속 들어주다 결국 지쳐버린 기억 등이다.


사람관계에서 서로가 편안함을 느끼고 건강한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선의 설정’, 즉 개인적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경계가 모호한 관계는 처음에는 친근해 보일지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오해와 불쾌감 그리고 치명적인 갈등으로 이어지기 쉽다.


침묵이 낳는 오해: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온라인 게임 내에서 흔히 일어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상사가 부하 직원의 노고를 격려하거나 주의를 줄 때, 어깨나 팔을 두드리는 등의 신체 접촉을 하는 경우가 있다. 남자 상사와 여자 부하 혹은 여자 상사와 남자 부하처럼 성별이 다른 경우 이러한 신체 접촉은 누군가에게 더욱 부담스럽거나 불쾌하게 다가올 수 있다. 이때 많은 사람이 초기 반응으로 침묵을 선택한다. 상사와 부하라는 조직 내 위계 구조 때문에 혹은 상대의 기분을 망치거나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으로 보일까 두려워 아무런 표현을 하지 못하고 상황을 넘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침묵은 상대에게 전혀 다른 신호로 해석된다. 나는 ‘불편하지만, 상하 관계와 분위기를 고려해 참는다.’라고 생각하지만,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이 정도 신체 접촉이나 표현은 괜찮은가 보다.’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생각이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은 상대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행동이 수용 가능한 범위 내에 있는지 판단한다. 거의 모든 사람은 상대의 마음을 제대로 읽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내가 표현하지 않은 불편함은 상대에게 ‘허용의 메시지’로 전달된다. 결과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자신이 선을 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신체 접촉의 수위나 언행의 거침없음을 점차 더 높여가게 된다.


골이 깊어진 후의 폭발이 가져오는 비극


처음의 작은 불편함을 참아내다 보면 어느 순간 그 행동은 개인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참다못한 사람은 결국 불쾌감을 드러내거나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터져 나온 나의 불쾌감은 상황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든다. 상대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며 반성하기보다는 오히려 당황스러움과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처음부터 싫다고 했으면 안 했을 텐데,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인제 와서 이러지?"

"딴마음을 품고 일부러 참았다가 지금 터뜨리는 것 아냐?"


상대는 그동안의 나의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뒤늦게 터져 나온 나의 문제 제기를 ‘순수하지 못한 의도’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치부하며 반발한다. 문제의 본질인 ‘선을 넘은 행동’은 사라지고, ‘왜 이제야 표현하는가?’에 대한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것이다.


초기에 명확하게 선을 긋지 않은 결과는 양쪽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한쪽은 지속적인 침해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겪고, 다른 한쪽은 의도치 않게 가해자가 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며 관계가 완전히 파탄 난다.


선을 정한다는 것의 진짜 의미


다른 사람에게 선을 긋는 행동을 거절, 배척 혹은 냉정한 태도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선을 긋는다’라는 말을 관계를 끊어내거나 상대를 거부하는 야박한 행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와의 건강한 관계에서 선(경계)을 정하는 것은 상대를 배척하기 위함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 오랫동안 안전하게 거닐기 위한 안내표지판을 세우는 일이다.


도로에 중앙선과 차선이 존재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차선은 운전자의 자유를 침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부딪히지 않고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존재한다. 관계의 선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관계에서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마음을 전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상대는 ”당신이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느끼는 거리는 어디까지인가?”라고 물으면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거리는 여기까지다.”라고 상대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의 기준과 경계를 명확히 아는 관계일수록 오해나 불필요한 마찰이 줄어든다. 나를 보호하는 동시에 상대가 실수하여 선을 넘지 않도록 돕는 것이 바로 경계 설정이 가진 본질적인 목적이다.


일상 속 경계 침해의 다양한 형태


신체 접촉만이 선을 넘는 유일한 사례는 아니다. 일상의 다양한 영역에서 경계가 모호해짐으로써 발생하는 갈등을 목격할 수 있다.


첫째, 사생활과 업무의 경계 침해이다. 퇴근 후나 주말에 걸려 오는 사적인 연락 혹은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라는 명목으로 이어지는 결혼, 연애, 재산 상태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사생활의 경계를 침해하는 행동이다. 상대의 이런 말에 대해 초기에 “주말에는 개인 일정에 집중하고 있다”라거나 “그 부분은 개인적인 일이라 말씀드리기가 어렵다”라고 단호하고 예의 바르게 선을 그어야 지속적인 침범을 막을 수 있다.


둘째, 감정 에너지를 갉아먹는 관계이다. 만나기만 하면 불평불만과 푸념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다. 상대의 감정을 다 받아주다 보면 정작 자신의 에너지가 소진된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은 나도 이야기를 깊이 들어줄 여유가 부족하다”라는 정서적 경계를 명확히 설정해야 감정 소진을 막을 수 있다.


셋째, 부탁과 거절의 영역이다.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거나 원치 않는 부탁을 계속해서 받아주는 것 역시 경계가 허물어진 증거다. 거절하지 못하는 내 태도는 상대에게 ‘언제든 부탁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지혜롭게 선을 전달하는 법: 초기에, 담담하게, 명확하게


상대와의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경계를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핵심은 초기 대응, 감정적이지 않은 태도 그리고 명확한 표현이다.


첫째,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상대로부터 불편함을 느낀 바로 그 순간 혹은 적어도 상황이 일어난 직후 이른 시일에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첫 번째나 두 번째 시도에서 부드럽게 전달하는 것이 열 번을 참고 폭발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깔끔하다.


둘째, 감정적이 아닌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화나 짜증을 섞어 말하면 상대는 메시지의 내용보다 태도에 반발하게 된다. 정색하거나 상대를 비난하기보다는 중립적이고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셋째, 상대의 행동을 규정하거나 비난하기보다는 그 행동으로 인한 내 느낌과 바라는 점을 중심으로 전달한다. 예를 들어, 상사가 내 신체를 접촉할 때 상사에게 “왜 내 허락 없이 마음대로 신체 접촉을 하세요? 저에게는 불쾌한 행동입니다” 와 같은 비난의 말보다는 “격려해 주신 마음은 감사하지만, 신체 접촉은 개인적으로 부담스럽고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신체 접촉 대신 말씀으로만 격려해 주셔도 충분히 힘이 됩니다”와 같은 말로 상대의 기분을 해치지 않으면서 자신이 정한 선을 명확하게 상대에게 전할 수 있다. 이처럼 상대의 의도를 먼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불편함과 소통 방식을 명확히 밝히면 상대도 방어 기제를 세우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수정할 수 있다.


스스로를 지키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존중한다


다른 사람과 완벽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먼저 배려하느라 자신의 정서적·신체적 경계를 방치하면 결국 남는 것은 지친 마음과 상처받은 관계뿐이다. 내가 나의 선을 분명히 밝히지 않으면서 상대가 알아서 배려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다.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과 가치관, 다른 사람과의 편안한 거리의 기준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허용하는 선을 스스로 확실히 알고, 그것을 상대에게 지혜롭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태도는 건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의 특징이다. 자신의 경계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비로소 다른 사람의 경계도 깊이 존중할 수 있다.

오늘 나의 인간관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혹시 참아야만 유지되는 관계가 있거나 혹은 모호한 경계 때문에 속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더 늦기 전에 담담하고 명확한 한마디로 나만의 선을 안내해 주는 것이 어떨까. 그것이 나와 상대 그리고 우리의 관계를 지키는 가장 성숙한 길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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