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임금은.

2041년, 신유년 김 씨 일상

by김동의

김 씨는 32년 넘게 몸담았던 대기업에서 정년퇴직을 했다.


만 60세. 뼈는 구부정해져 그렇지 않아도 움츠리고 수그러진 자세가 사람을 더욱 의기소침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무릎이 시리고 오른쪽 발목에선 아킬레스건을 딱딱 때리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백발에 근육이 쪼그라들고 주름살은 깊어져 한여름 녹는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리는 듯 흐릿한 윤곽의 얼굴은 초라하면서도 괴팍한 인상으로 가득해, 시니어 취업 시장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시는 데 크게 일조했다.


김 씨 퇴직금의 대부분은 2024년 초 실행했던 농협 토지담보대출을 상환하는 데 쓰였다. 32년간 부품 발주 업무만 하느라 엑셀 파일로 Ctrl+V, Ctrl+C 하는 일 외에 별다른 IT 능력이 없고 공인된 자격증도 전무해, 화성시 우정읍 소재의 자원 재활용 공장에 어렵사리 계약직으로 취직하는 데 성공했다.


김 씨는 알루미늄 자원반에 편성돼 이 공장으로 몰려드는 알루미늄 폐기물 더미를 해체하고 컨베이어 벨트 속에서 알루미늄이 아닌 불순물을 골라내는 임무를 맡았다. 캔 속의 끈적해진 내용물에 의해 작업용 장갑은 금세 검게 오염됐고, 비양심적인 사업장에서 함께 묶여 온 똥 묻은 휴지도 불평불만 없이 솎아내야 했다. 악취와 들끓는 벌레쯤은 건설현장의 먼지와 같이 늘 당연하고, 퇴직하는 순간까지 함께해야 하는 숙명과 같은 존재로 여겨야만 했다.


6시에 시작된 작업은 10시가 되어서야 잠시 컨베이어 벨트가 멈췄고, 10분간의 휴게 시간을 알리는 벨소리가 공장 가득히 진동했다. 좀처럼 동료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 줄 모르는 김 씨는 홀로 휴게실 구석진 곳의 벤치에 앉았다. 곳곳에서 수다 떠는소리로 가득했지만 김 씨는 내내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알루미늄 3반 반장이 김 씨에게 보리음료 캔을 내밀었다. 김 씨는 캔을 받아 들며 본능적으로 성분을 살폈다. 식품유형: 탄산음료, GMO 보리추출액 80%(고형분 3% 우크라이나산), 아스파탐, 이산화탄소, 구연산삼나트륨, 액상과당...


"김동의 씨? ○○ 출신 엘리트였다던데 열심히 안 사셨나 봐? 시니어 일자리로 이런 데를 다 오시고?"


"네… 그렇게 됐네요."


"생전 궂은일 안 하셨나 봐? 손이 너무 느리셔서 몇 번이나 기계를 멈출 뻔했다고요. 음료 남기실 거면 내용물은 꼭 비우고 분리수거 하시고용~"


김 씨보다 한 살 어린 알루미늄 3반 반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 업계로 뛰어든 베테랑이었다. 직급과 경력이 높다는 이유로 반존대를 섞어 쓰는 그의 말투가 유쾌하지 않았지만, 저성과자로 낙인찍혀 해고당하거나 일당을 까이지 않기 위해 애써 웃으며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알루미늄 3반 라인에 서서 폐기물을 골라냈다. 차라리 쉬지 말걸, 괜히 휴게실에 앉았다가 일어서니 허리와 다리가 더 저려오는 듯했다. 12시가 되자 또다시 컨베이어 벨트가 멈췄고 작업장의 LED가 모두 소등되었다.


식당에서도 김 씨는 누구와도 말을 섞기 싫다는 듯 외진 곳에 앉았다. 아틀라스 III가 밀키트 포장을 뜯고 단시간 내 조리한 음식을 아틀라스 II가 모바일 사원증을 인식해 앞까지 가져다줬다. 중국산 GMO 콩으로 제조한 콩스테이크 한 점, 돼지고기 함량이 40%에 미치지 못하고 아질산나트륨으로 잔뜩 절여진 소시지 한 개와 GMO 쌀밥 한 뭉치가 전부였다. 주어진 식사 시간도 10분.


18시까지 김 씨는 다시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야 했다. 땀이 차올라 몇 번이나 다시 고쳐 쓴 축축한 마스크에 장갑의 악취가 스며들었지만, 아픈 아내와 막 취업에 성공한 아들을 생각해 버텨냈다. 탈의실 안 가로 20cm, 세로 60cm의 작은 철제 사물함 안에는 고용주가 선심 쓰듯 직원들에게 지급한 요거트 한 병이 담겨 있었다. 원유 78%(네덜란드산), 혼합탈지분유(호주산), 인공젤라틴, 유화제 2종, 아마인유, 설탕, 덱스트린...


김 씨는 매우 허기가 졌으나 괜한 병원 신세를 지기 싫어 도로 내려놓고 환복 했다.


도로 인프라가 부족한 우정읍의 로보택시 정류장까지 15분은 족히 걸어가야 했다. 가는 길에 아들과 통화를 하며 일상적인 안부를 묻곤 끊었다. 아들은 취업 재수까지 하며 어렵사리 타일 시공 회사에 취직했다. 대치동 은마아파트 인테리어 시공 수천 건을 수주한 이력이 있고 정부로부터 까다로운 인증을 통과한 건실한 회사이며, 일당도 18 사토시(Satoshi)로 김 씨의 9 사토시에 비해 두 배는 높은 양질의 일자리였다.


집에는 자가면역 질환으로 병원을 수시로 오가야 하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병원 류머티스 내과 아틀라스 IV는 아내의 단백뇨 수치와 혈청크레아티닌 수치가 줄지 않는다며 S사가 개발한 신약을 써 보자고 권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팔짱을 낀 채 병원을 빠져나오는 순간 진료비가 청구됐다.


108 사토시.


부부는 병원 앞 로보택시에 올라 뉘엿뉘엿 져가는 해를 멍하니 바라보며 집으로 향했다.


[나무위키 : 2041년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본 국제정세]

신냉전주의, 패권주의의 세계는 미국과 중국이 양분했다. 남미는 물론 그린란드부터 점령되기 시작한 유럽은 모조리 미국령으로 다스려졌고, 일대일로 사업의 결실을 맺은 중국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전리품처럼 가져가 다스렸다. 오일머니로 움직였던 중동 국가는 미국의 핵무기에 의해 전멸되었고 봉쇄됐다. 스스로 고립·붕괴된 북한은 중국으로 흡수되어 자치구로 운영되었으며, 미국령 규슈 지역에서 시작된 신칸센은 해저터널로 부산을 경유하여 중앙아시아, 유럽까지 운행하게 됐다. 신칸센 탑승권 비용은 비즈니스석 항공권을 상회하여 근로소득자는 사실상 이용이 불가능했다.

오직 대한민국만 아슬아슬하게 주권을 유지했지만 미국과 중국 틈에 치이며 막대한 무역적자만 쌓여가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식량 안보는 진작 무너져 서민들은 값싼 GMO 농산물과 항생제로 잔뜩 길들여진 육류만을 섭취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였다.

2020년대 들어 슬롯개혁을 강하게 드라이브한 대통령이 탄핵되고 숙청당했다. 그렇게 만든 세력은 다름 아닌 집권 여당이었다. 신중론을 내세우며 개혁을 주저했던 여당 당대표와 최고위원들은 언론과 손잡고 탄핵된 대통령을 비롯해 당내 개혁 세력들을 비현실적 극단주의자로 몰아 악마화하고, 수사기관과 결탁해 모조리 기소되게 했다.

따라서 부동산 개혁은 또다시 수포로 돌아가 수도권 아파트 값은 우상향 했고, 빈부격차는 불가역적으로 커졌으며, 기업 오너들의 로비로 노란봉투법 등 진보된 노동법들은 모조리 폐기되었다. 노동 유연화가 극대화된 시장에서는 일반해고가 가능함은 물론 성과연동형 임금체계와 강화된 포괄임금제가 대부분의 사업장으로 확대 적용되었다.

양대 노조 수뇌부의 안일함과 부패로 허울뿐인 노동조합만 낮은 결성률로 생존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과거에 비해 대폭 축소되었다. 그로 인해 양질의 일자리는 모조리 사라지고 대부분의 일자리는 LLM과 아틀라스 IV로 대체되었으며, 사람의 일자리는 로봇이 하지 못하는 허드렛일만 하는 직종으로 몰렸다.

국민건강보험 역시 붕괴됐다. 대기업의 바이오 사업 집중 투자와 영리 목적 의료법인이 잠식하며, 건강보험 역시 대기업 보험회사 상품에 가입해야만 혜택을 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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