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오래 일한 사람이 아니라, 더 오래 은혜를 누

14장 「포도원의 품꾼: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식」

by신아르케

예수님의 포도원 품꾼 비유는 처음 읽으면 조금 불편하다.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이 있다.

정오 무렵 들어온 사람도 있다.

오후 늦게 들어온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일이 끝나기 직전에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하루가 끝나고 품삯을 받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주인은 모두에게 같은 품삯을 준다.

먼저 온 사람도 한 데나리온.

늦게 온 사람도 한 데나리온.

하루 종일 뜨거운 햇볕 아래서 일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일했는데 왜 저 사람과 똑같이 받습니까?”

어쩌면 나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내가 더 오래 일했다.

내가 더 많은 수고를 했다.

내가 더 많은 시간을 드렸다.

그러니 더 많이 받아야 한다.

이 논리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더 많이 일하면 더 많이 받고,

더 좋은 성과를 내면 더 많은 보상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같은 계산법을 적용하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바로 그 계산법을 무너뜨린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성과급 체계와 다르다.

구원은 임금이 아니다.

구원은 공로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구원은 은혜다.

먼저 온 품꾼들이 불평한 이유는 주인이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주인은 처음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정확하게 주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었다.

늦게 온 사람이 자신과 똑같이 받는 순간, 자기가 받은 것이 갑자기 작아 보이기 시작했다.

참 이상하다.

내가 받은 것이 줄어든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것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불행해진다.

여기서 인간의 마음이 드러난다.

나는 부족해서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다른 사람이 많이 받은 것처럼 보여서 불평한다.

내가 은혜를 못 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이 은혜받은 것이 싫은 것이다.

그래서 비교는 은혜를 망각하게 한다.

내가 받은 것만 바라보면 감사할 수 있다.

그러나 옆 사람과 비교하는 순간 계산이 시작된다.

“나는 더 오래 믿었는데.”

“나는 더 많이 봉사했는데.”

“나는 저 사람보다 더 희생했는데.”

“나는 신앙생활을 더 오래 했는데.”

그 순간 신앙은 은혜의 언어에서 공로의 언어로 바뀐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보다 나의 수고를 계산하는 마음이 커진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게 된다.

“나는 더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 생각을 뿌리부터 뒤집는다.

나는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랬다.

구원받기 전에도 그랬고,

오래 신앙생활한 지금도 그렇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남보다 오래 일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더 의로워서도 아니다.

내가 더 많이 드려서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불러주셨기 때문이다.

포도원 주인이 시장으로 나가 품꾼을 찾았듯,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을 찾아오신다.

이 점이 참 중요하다.

품꾼들이 먼저 포도원 주인을 찾아가

“저를 고용해 주십시오.”

라고 한 것이 아니다.

주인이 나갔다.

주인이 불렀다.

주인이 포도원으로 데려왔다.

구원도 마찬가지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찾으셨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다.

내가 먼저 구원의 길을 알아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길을 열어주셨다.

그러므로 구원의 시작부터 끝까지 은혜다.

그런데 나는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쉽게 잊는다.

처음에는

“주님, 저 같은 죄인을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한다.

그러다가 신앙의 시간이 길어지면 조금씩 생각이 바뀐다.

“나는 그래도 이 정도 했지.”

“나는 꽤 오래 섬겼지.”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지.”

그때부터 은혜의 사람이 품꾼의 계산기를 들기 시작한다.

이번 비유가 무서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오래 신앙생활한 사람이 은혜를 더 잘 알 것 같지만,

오히려 자기 공로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품꾼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는 순간,

나는 주인의 자리에 앉으려고 한다.

누가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판단하고,

누가 더 가치 있는 사람인지 계산한다.

그러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구원은 하나님의 권한이다.

은혜를 얼마만큼 베풀 것인지도 하나님의 권한이다.

나는 받을 자격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도 새롭게 들린다.

예전에는 이 말씀을 조금 다르게 이해했다.

먼저 구원받은 사람도 떨어질 수 있고,

나중에 온 사람이 결국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경고처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포도원 비유의 문맥에서 보면 이 말씀은 인간이 만든 서열을 무너뜨리는 말씀에 더 가깝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먼저 왔다고 더 우월하지 않고,

늦게 왔다고 더 열등하지 않다.

오래 믿었다고 더 큰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늦게 돌아왔다고 더 작은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다.

영생은 나누어지는 상품이 아니다.

삼십 년 믿은 사람에게 영생 백 퍼센트,

죽기 직전에 돌아온 사람에게 영생 십 퍼센트를 주는 식이 아니다.

구원은 구원이다.

영생은 영생이다.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십자가의 강도다.

그는 평생 선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아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한 시간도 없다.

봉사한 경력도 없다.

선교를 한 것도 아니다.

교회 공동체를 오래 섬긴 것도 아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을 바라본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 인간의 공로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다.

그 강도가 내세울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게 있었던 것은 은혜를 붙드는 믿음뿐이었다.

그러면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마음대로 살다가 죽기 직전에 믿으면 가장 이득 아닌가?”

표면적으로 보면 그럴듯하다.

젊을 때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세상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고,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면 동일한 영생을 얻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생각 속에는 아주 중요한 오해가 숨어 있다.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삶이 더 좋은 삶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손해이고,

세상 방식대로 사는 삶은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천국의 보화를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의 계산이다.

앞 장의 보화 비유를 생각하면 답은 분명하다.

가장 귀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까.

“이 보화는 나중에 가져야겠다. 지금은 쓰레기를 더 즐기고 싶다.”

아니다.

보화의 가치를 진짜 알았다면 오히려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왜 나는 이것을 더 일찍 발견하지 못했을까.”

그래서 일찍 포도원에 들어온 것은 손해가 아니다.

특권이다.

이 부분이 이번 장에서 내게 가장 크게 다가왔다.

나는 지금까지 먼저 온 품꾼의 입장에서 비유를 읽었던 것 같다.

“저 사람보다 오래 일했다.”

“더 많이 수고했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면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나는 더 오래 일한 사람이 아니라,

더 오래 주인과 함께 포도원에 있었던 사람이다.

이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신앙생활 삼십 년은

삼십 년 동안 구원의 값을 치른 시간이 아니다.

삼십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시간이다.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기도할 수 있었고,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었고,

넘어질 때 다시 일으킴을 받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위로와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었던 시간이다.

그 시간을 노동의 시간으로 볼 것인가,

은혜의 시간으로 볼 것인가.

이 차이가 크다.

만약 신앙생활을 품삯을 얻기 위한 노동으로 본다면 오래 믿은 것이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이미 복이라면,

오래 믿은 것은 더 오래 복을 누린 것이다.

나는 남보다 더 오래 고생한 사람이 아니다.

남보다 더 오래 은혜를 누린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늦게 돌아온 사람을 시기할 이유도 없어진다.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당신도 이 은혜를 알게 되었군요.”

“당신도 이 포도원에 들어왔군요.”

“당신도 이제 주인과 함께하게 되었군요.”

그것이 복음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자주 비교하는가.

왜 저 사람은 나보다 편해 보이는가.

왜 저 사람은 적게 수고하고 더 많이 받은 것 같은가.

왜 나는 이런 시간을 지나야 하는가.

그때 포도원 주인의 말씀이 들린다.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

돌아보면 정말 그렇다.

하나님은 나에게 약속을 어기신 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받을 수 없는 것을 너무 많이 주셨다.

생명을 주셨고,

그리스도를 주셨고,

용서를 주셨고,

믿음을 주셨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셨다.

그런데도 나는 옆 사람을 보며 불평한다.

내가 받은 은혜보다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를 더 크게 바라본다.

이번 장을 읽으며 다시 배우게 된다.

하나님 나라에는 비교가 어울리지 않는다.

모두가 빚진 자이기 때문이다.

먼저 온 사람도 은혜가 필요하고,

나중 온 사람도 은혜가 필요하다.

오래 믿은 사람도 은혜로 서 있고,

오늘 믿기 시작한 사람도 은혜로 선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공로를 내밀 수 없다.

그래서 복음은 사람을 평등하게 만든다.

모두 죄인이라는 점에서 평등하고,

모두 은혜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평등하고,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붙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차이가 있다면 받은 은혜를 얼마나 오래 누렸는가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렇게 기도하고 싶다.

주님,

제가 오래 믿었다는 사실을 공로로 계산하지 않게 하소서.

봉사한 시간,

기도한 시간,

헌신한 시간,

포기한 것들을 장부처럼 기록하며

다른 사람보다 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소서.

제가 무엇을 드렸는지보다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를 보게 하소서.

늦게 돌아온 사람을 보며 시기하지 않고 기뻐하게 하소서.

십자가의 강도에게조차 영생을 주시는 주님의 넓은 은혜를 찬양하게 하소서.

그리고 제가 일찍 포도원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손해로 여기지 않게 하소서.

주님을 더 오래 알 수 있었던 것,

더 오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

더 오래 기도할 수 있었던 것,

더 오래 회개할 수 있었던 것,

더 오래 주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알게 하소서.

오늘도 기억하게 하소서.

나는 더 오래 일한 사람이 아니라, 더 오래 은혜를 누린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품삯을 계산하는 품꾼이 아니라,

주인과 함께 포도원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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