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번져도 괜찮아, 곧 계절이 올 거야.
낙관, 여백에 남긴 이름
- 제16화 -
그대,
내가 아끼는 낙관(落款)들은 대부분 친한 이들에게 받은 선물입니다.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지만,
하나씩 꺼내 들여다보면 작은 붉은 글씨마다
그것을 새겨 준 사람의 시간과 다정한 마음이 번져 있습니다.
돌에 새겨진 글자는 작아도, 그 안에 담긴 마음은 결코 작지 않지요.
글씨나 그림을 마감하고 마지막으로 낙관을 찍는 순간을 좋아합니다.
하얀 여백에 붉은 자국 하나가 또렷이 놓이면,
비로소 작품이 제 숨을 쉬며 이름을 얻는 것 같습니다.
그 작은 도장에는 늘 이런 고백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여기까지가 잘 살아낸 내 몫’이라고 말입니다.
삽화 : 쳇지티피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 화백도
자신만의 빛깔을 찾아 먼 길을 떠났던 사람이었지요.
익숙한 고국을 뒤로하고 뉴욕의 낯선 도시로 건너가,
홀로 견뎌야 했던 외로움 속에서 그는 밤새 점을 찍고 또 찍었습니다.
그 작은 점들이 모여 깊고 푸른 밤하늘이 되고,
이름 모를 별이 되어 마침내 자신만의 우주를 이루었습니다.
그의 점화를 보고 있으면
한 사람의 생애 역시 저렇게 수많은 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어 집니다.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
환하게 빛나던 날과 아무도 모르게 숨죽여 견뎌야 했던 날들.
그 모든 점들이 모여 한 사람의 표정을 만들고,
하나의 이름을 이루어가는 것이겠지요.
나는 세월이 묻어난 내 이름 석 자를 참 좋아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평범한 이름에 불과하겠지만,
내게는 지나온 세월과 마주했던 바람의 냄새가 깃든 이름입니다.
내가 쓴 시와 글씨,
서툴게 물들인 수채화 모퉁이에 그 이름을 남기는 것은
잘 살아왔다고 자랑하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돌아보면 아쉬운 날이 참 많았습니다.
지우고 싶은 말과 다시 돌아가 고쳐 쓰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요.
때로는 마음과 달리
붓끝이 미끄러지듯 삶의 선이 삐뚤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시간을 내 삶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반듯하게 그은 선만 모아서는
한 사람의 생애라는 완성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테니까요.
붓끝에서 번진 자국도,
끝내 지우지 못한 얼룩까지도
모두 내가 살아온 날들의 다정한 일부입니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은 잘 그은 선보다,
그 선이 뜻밖에 어긋났던 자리에서
더 깊게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서 나는 오늘도
내 이름을 함부로 지우거나 부끄러워하고 싶지 않습니다.
잘한 날의 나뿐만 아니라,
서툴고 부끄러웠던 날의 나까지 가만히 품고 걸어가려 합니다.
그대의 이름 또한 그러하겠지요.
누군가에게는 흔한 이름일지라도,
그 이름 아래에는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었던
그대만의 독연한 날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 테니까요.
언젠가 긴 세월을 돌아보는 날,
그대의 이름 석 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으면 합니다.
얼마나 큰일을 이루었는가 보다는,
어떤 마음으로
그 계절들을 건너왔는지 조용히 떠올려보아도 좋겠습니다.
오래된 그림의 여백에
붉은 낙관 하나가 살포시 머물 듯,
그 이름 아래
그대가 견디고 사랑했던 날들을 가만히 놓아두기를.
그리하여 한 생애가 저물어갈 때,
그대의 이름이
그대 자신에게 가장 따뜻하고 포근한 이름으로
남기를 마음 모아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