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보내주어야 할 시간

26. 10. 5

by푸른 잎사귀

그동안 이번 주에는 뽑아야지, 뽑아야지 하면서도 막상 텃밭에 도착하면 맛있는 고추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모습을 보고는 늘 다음으로 미루곤 했던 고추나무를 오늘 모두 뽑았다.


KakaoTalk_20261006_174237901.jpg이제는 잎만 무성할 뿐 고추가 많이 달리지 않는다


봄에 모종으로 심었던 청양고추, 꽈리고추, 아삭이고추는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매주 맛있는 고추를 내어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잘 자라지 않는다. 오늘 청양고추는 그나마 몇 개 따올 것이 있었지만, 아삭이고추와 꽈리고추는 거의 끝이 난 듯했다. 아삭이고추는 내 새끼손가락보다도 가늘게 자란 것이 열 개쯤 보였고, 꽈리고추는 꽃이 지고 나서 작게 자라고 있는 모습으로 더 이상 커지지 않을 채 몇 개 달려 있을 뿐이었다.


꽈리고추는 ‘밥상’이라는 별명을 가진 지인이 특히 좋아하는 고추라서 심어놓고 지인을 만날 때마다 몇 번이라도 나눠줄 수 있었던 것이 참 좋았다. 나중에 지인의 입을 통해 메추리알을 넣고 장조림을 했다느니, 꽈리고추찜을 했다느니, 지난번에 보내준 감자와 함께 감자볶음을 해 먹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친정엄마라도 된 것처럼 괜히 마음이 뿌듯하고 좋았다.


그렇게 많은 추억을 만들어준 고추나무를 오늘 모두 뽑아 정리하고 나니 그 자리가 휑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정말 뽑아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게 심은 배추가 고추나무가 있던 자리에서 자라고 있는데, 다른 곳의 배추보다 조금 작게 자라고 있었다. 아마 고추나무가 햇빛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고추나무가 자리를 비워주어야 배추도 햇빛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


KakaoTalk_20261006_174237901_06.jpg고추나무가 자라던 자리에 위치한 배추의 크기가 다른 것보다 상대적으로 작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고추나무를 뽑고 밭을 둘러보니 늦게 심은 무가 흙 위로 작은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작은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신기하고 기특한지 한참 들여다보고 사진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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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에는 벌레가 갉아먹어 구멍이 뚫린 흔적과 먹을 것을 소화시킨 검은 똥도 보였다. 내가 심은 배추를 지키기 위해 친환경 약을 기준량보다 조금 강하게 희석해서 배추에 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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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61006_174237901_11.jpg배추


오늘은 앞쪽 텃밭의 노부부도 나오셨다. 고구마를 캐러 오신 모양이다. 고구마를 캐면서 즐거워하시는 두 분의 대화 소리가 밭에 울려 퍼지는데, 그 모습이 참 정겨웠다.


뒷줄 텃밭에는 사십 대쯤 되어 보이는 부부가 있었다. 텃밭 도로 한쪽 구석에 파라솔을 펴고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마다 텃밭을 즐기는 모습이 달랐지만, 그 풍경들이 모두 가을 텃밭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바람도 많이 불고 날도 제법 쌀쌀했다. 이제 모기도 없고, 여름처럼 햇볕에 땀을 흠뻑 흘리지도 않는다. 농사를 지어보니 가을이라는 계절의 날씨가 참 좋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바람을 맞으며 밭일을 하기에도 딱 좋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특별히 밭에서 따올 것도 없구나.’


늦게 심은 오이는 꽃은 피었지만 왠지 열매를 맺기는 어려울 것 같고, 상추도 여름만큼 자라지 않는다. 갓과 알타리는 솎아주었으니 다음 주쯤이면 밭에서 할 일도 별로 없을 것 같다. 고수도 생각했던 것만큼 많이 자라지 않았다.


KakaoTalk_20261006_174237901_01.jpg늦게 심었더니 오이의 성장 속도가 느리다


씨를 뿌려놓은 시금치와 당근, 비트는 이제 막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싹이 자라기는 하지만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으니 앞으로 잘 자랄지, 자라다 멈출지는 알 수 없다.


KakaoTalk_20261006_174237901_10.jpg시금치


직접 씨를 뿌려보니 모든 것에는 뿌려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금 늦게 뿌렸다고 해서 씨앗이 자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저마다 가장 잘 자랄 수 있는 시간이 따로 있는 것 같다.


농사를 지으면서 계절의 때를 배우고, 식물의 시간을 배운다.


그리고 오늘은 그동안 조금씩 캐두었던 고구마도 마저 정리했다. 남아 있던 고구마 다섯 개를 모두 캐고 밭을 정리했더니 오늘 캔 고구마만 4kg이었다. 그동안 캔 고구마는 지인들에게 나누어주었으니 오늘 캔 것은 온전히 내 몫으로 남겨두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마지막으로 따온 청양고추를 반찬을 만들 때 사용하려고 냉동실에 넣었다. 지난번에 따온 청양고추도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장아찌를 또 만들기에는 이미 만들어놓은 것이 있으니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문득 고추부각을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를 찾아보며 만드는 방법을 익히고 건조기에 넣었다. 잘 시간이 되어 일단 전원을 껐다. 내일 다시 이어서 말리면 된다. 고구마 농사를 지으면서 건조기를 하나 장만했는데, 이렇게 여러모로 유용하게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오늘 솎아온 갓과 고구마줄기를 넣어 고구마줄기(갓) 김치도 만들었다. 아직 맛을 보지는 않았지만 어떤 맛일지 궁금하다. 바로 먹어도 맛있지만 김치는 역시 숙성의 시간이 지나야 제맛이 난다.


KakaoTalk_20261006_174237901_02.jpg무와 갓


KakaoTalk_20261006_174237901_05.jpg쪽파, 무, 상추 그리고 베트남댁이 나누어준 박하와 고수


고구마도 캐자마자 바로 먹는 것보다 며칠, 혹은 시간을 두고 숙성시키면 단맛이 올라온다. 고구마김치도 시간이 지나야 맛이 깊어진다. 오늘 만들어 말리기 시작한 고추부각도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밭에서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기다리는 일도, 수확한 것을 음식으로 만들어 맛이 들기를 기다리는 일도 결국은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모든 것은 저마다의 시간이 필요하다.


고추나무를 뽑아야 할 때가 있었고, 씨앗을 뿌려야 할 때가 있었으며, 수확한 고구마가 제맛을 내기까지 기다려야 할 시간도 있다. 고구마김치도, 고추부각도, 단맛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고구마도…….


그리고 어쩌면 나 역시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천천히 익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일 :


고추나무(청양고추·꽈리고추·아삭이고추) 모두 뽑고 밭 정리

늦게 심은 배추와 무 상태 살펴보기

배추에 친환경 약 살포

갓과 알타리 솎아주기

고구마 남은 것 모두 캐기 → 오늘 수확량 4kg

마지막 청양고추 냉동 보관

남은 청양고추로 고추부각 만들기 시작

고구마줄기와 솎은 갓으로 고구마줄기김치 담그기

건조기에 고추 넣어 말리기


할 일 :

고추부각 건조 마무리하기

고구마김치 숙성 후 맛보기

배추·무·시금치·당근·비트 자라는 모습 살펴보기

늦게 심은 오이와 상추 상태 지켜보기

남은 밭작물 정리하기



한 줄 요약 :

고추나무를 뽑으며 한 계절을 보내고, 씨앗부터 김치까지 모든 것에는 저마다 기다려야 할 때가 있음을 배운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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